새하얀 바탕 위에 드러난 검은 얼굴의 여자의 모습. 흑백만 있는 세상에서 그녀는 평범한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으로
그녀를 마주한다면 우리는 그녀의 얼굴 반쪽을 뒤덮고 있는 화염상모반에 눈길이 갈 것이며 ‘선화’라는 여자를 보기보다도 그 붉은 반점만을 보며 그녀가 정상이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박에 눈치 챌
것이다.
언제나 평범한 세상과는 다른, 마치 그녀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인
것 마냥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세상 그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녀의 가족이 설화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하지만 당시에 어리기만 했던 그녀의 언니는 선화에게 핀잔을 주기만 했고 자신의 딸이지만 괜찮다, 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아버지, 집안의 모든 불화는 그녀 때문이라는
듯이 굿판을 멈추지 않았던 할머니, 그리고 어린 그녀를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어머니까지. 어찌 보면 그녀의 가장 원초적인
울타리가 무너졌던 그때, 그녀는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겨진 것처럼 지내야 했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꽃을
다루는 그녀지만 그녀의 손은 늘 습진에 진물이 흘러 넘쳤던 것처럼, 괜찮은 듯 태연히 지내는 듯 했지만 과연 설화는 괜찮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엄마의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한 건 언니가 결혼한 뒤부터였다. 그 전에는 누구라도 엄마의 죽음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몹쓸 여편네라고 청했다. 그건 엄마가 살아 있을 때도 그랬고, 죽어서도 그랬다. 자식을 버리고 죽은 어미는 어미가
아니라고, 그냥
미치년이라고, 몸뚱이만
병신인 줄 알았더니 결국 병신 짓으로 죽은 년이라고, 그런 년이었으니 집안 꼴이 제대로 돌아갔을 리 있었겠느냐고, 미친년을 집안에 들여놓고
살았으니, 집안이 이지경이
된 것이라고, 엄마
잃은, 겨우 열댓 살 먹은
손녀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던 할머니와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본문
그래서 일까. 선화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전반전으로 회색 빛의 느낌이 들곤
한다. 영롱한 빛이 나는
여자의 모습이 아닌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조용히 지내고 있는 하나로서만 살고 있는 모습인데 그런 그녀에게 그녀 자신이 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바로 영흠이 내민 수국 다발이었다. 타인을 위해서만 만들었던 꽃다발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그녀는 다시 세상과의 화해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어린 마음에 언니에게 했던 반항이 세상과의 벽을
쌓을 것이었다면 그가 건넨 수국으로 세상과의 벽을 허물고 나오려 하는 그녀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아버지와 마주하게 되고 언니와의
거리도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엄마도 없었지만 이 집에서 살았던 시간 중에서 가장
시끄럽고, 가장 소란스러운
저녁식사였다. 배부르다며
뒹굴거리던 조카애는 어느새 병준의 무릎에 발 하나를 걸쳐두고 게임을 하고, 술기운과 포만감으로 어른들도 하나둘씩 마루에 드러누웠다. 벽과 지붕만 남은 빈집에 봄 달빛이
차곡차곡 차오르기 시작했다. –본문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얼굴을 누군가에게
가려야만 하는 얼굴이었다면 이제부터의 그녀의 얼굴은 당당히 세상을 향해 드러낸 모습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녀의 외모가 남들과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틀리다고
규정해버리는 우리 스스로가 선화를 상처 속에 살게 한 것이 아닐까. 세상을 냉철하게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따스하게 변해가는 모습으로
마지막 장면을 마주했기에 마음 편하게 이 이야기를 덮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