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만 되면 어김 없이 문 앞에 나타나는 이웃 남자의 관한 이야기는 이전부터 종종 들어왔기에 알고는 있었다. 그래, 이 이야기를 읽기 전이었다면 나는 그저 한 남자가 매일 네 시만 되면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야말로 이상한 이웃에 대해 고발하는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이 나타나는 이웃이란 이름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불청객을 두고, 소설을 읽기 전에는 그저 내쫓거나, 그 시간이 되면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간다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등등의 생각들만 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네 시마다 나타나는 수상한 그에 대한 생각보다도 동일한 상황 속에서 너무도 변해버린 관계와 상황에 중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단순한 줄거리인 매일 모습을 드러내는 이웃 남자가 포커스를 맞춰‘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발현으로 인해 변해가는 주인공들의 의심 흐름들을 쫓아가다 보면 무언가 섬뜩함이 밀려온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본문
40여년의 세월 동안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던 에밀은 그의 아내인 쥘리에트와 함께 시골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은 세우고서 그들의 마음에 꼭 맞는, 이른바 <우리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고요한 시골이기에 장을 보러 나가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들에게 이 집은 너무도 완벽한 공간이었기에 그런 수고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웃은 심장의학을 전공으로 한 의사였으니, 오롯이 한 채 밖에 없는 그 이웃마저도 완벽한 그들의 노후에 알맞은 이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분란하게 그들의 <우리 집>에서 자리하고 있을 즈음, 그들의 유일한 이웃인 팔라메드 베르나르댕이 방문을 하게 된다. 이웃집에 이사를 온 자신들을 위해 방문해 준 베르나르댕에게 에밀과 쥘리에트는 너무도 고마움을 표현하게 되는데 희한하게도 그의 방문은 그 다음날도 계속되게 된다. 별다른 말도 없이 무언가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자리 잡고 있는 베르나르댕에게 에밀은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지만 그는 <아니요>, <그렇소>라는 대답만을 하고 어제와 같이 두 시간을 진득하니 앉아 있다 여섯 시가 되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날 까지만 해도 에밀과 쥘리에트는 그의 두 번째 방문이 친절한 이웃의 예의상 방문이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베르나르댕은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 그들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너무도 친절했던 그들의 이웃은 이제 서서히 그들에게 공포를 전해줄 만큼 기이한 자로 변모하게 되며 이 과정 안에서 에밀과 쥘리에트는 일부러 그 시간대에 외출을 하고 때론 방에 숨어 문을 열어주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 무엇도 베르나르댕의 방문을 막을 수가 없다.
내 말 좀 들어 봐. 그 사람이 골치 아픈 건 사실이야.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멋진 생활을 하고있잖아, 아니야? 이런 삶이야말로 우리가 줄곧 바라 온 거잖아. 이렇게 어이없고 하찮은 일로 이 생활을 망칠 수는 없어.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야. 두 시간은 하루의 12분의 1이야. 다시 말해서 대단한 게 아니라고. 우리는 매일 스물두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어.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어? 하루에 두 시간도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봤어? –본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라는 말처럼 그들은 이 불청객의 방문을 어떻게든 이겨 내보려 생각했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스스로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베르나르댕만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그들은 그의 부인을 함께 저녁에 초대하게 되는데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사투는 베르나데트를 마주하게 되면서 진퇴양난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에밀 부부가 너무도 아끼던 에밀의 제자인 클레르의 갑작스런 방문을 기뻐할 틈도 없이 손녀딸과 같은 그 아이가 베르나르댕씨의 무자비한 방문에 의해 황급히 돌아가고 다시는 그 아이를 마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이제 베르나드댕씨는 그들의 삶의 일부를 좀 먹는 것이 아닌 40여년의 시간 속에 그들이 축적해 놓은 모든 것들을 피폐화시키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로 부상하게 된다.
그저 고함 한번이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을 너무 오랜 시간 에밀은 참고 지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그 불청객이 나타나지 않지만, 오후 4시만 되면 그는 숨이 조여오는 듯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며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불면증에 의해 뒤척이는 순간 다시금 베르나르댕의 삶에 끼어들게 된다.
어느 날 그 사내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감옥을 탈출하기로 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비열한 간수처럼 나는 도망치는 그 불행한 사내를 붙잡았다.그러고는 의기양양한 밀고자처럼 그를 도로 감옥에 처넣었던 것이다. –본문
죽을뻔한 고비를 넘긴 베르나르댕을 구한 이후부터 에밀을 그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의 삶에 베르나르댕이 조금씩 진입해 왔을 때 처음에는 좋은 이웃에서 점차 괴기스러운 이웃을 넘어 자신들의 삶에서 사라지길 바랐던 베르나르댕에 대한 에밀의 감정은 이제는 그 자신이 베르나르댕을 구해줘야만 하는 구조자의 신분으로 변모하여 그를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다시 눈꽃이 내리기 시작하는 오늘, 에밀과 쥘리에트의 삶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베르나르댕씨의 방문은 없다는 것과 그들에게 괴물 같은 여인으로 보이던 베르나데트는 쥘리에트의 가장 친한 벗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4월 2일~3일과 6월 21일의 그날의 이야기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는 것과 이제 이 사건을 아는 것은 에밀과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베르나르댕씨의 방문은 어떠한 의미였는지, 그의 방문만으로 이 모든 관계는 물론 그들의 심리적인 변화를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노라면 변화무쌍한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더 두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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