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속 전도연은 어느 날인가 박신양에게 ‘너한테 가면 앞으로 가슴 아플 날이 참 많을 것 같은데..” 라는 육감에서 오는 경고를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그녀는 자신을 대신 해 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 부하를 살리기 위해 자수를 하러 가는 박신양의 뒷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제 겨우 3~4장을 읽었을 뿐이지만 약혼자의 집에 머물고 있는 서영을 보기 위해 흰 눈이 가득한 그날 그녀를 보러 온 제이어드를 보면서, 그리고 말 없이 푸른 빛이 그득한 반지를 주고 돌아서는 그를 보면서,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리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한 장 한 장 이야기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거기서 그는 말을 멈췄다. ‘….그냥 보는 걸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가끔 그게 되지 않을 때가 있어. 어떤 날은 정신을 차려 보면 이렇게 네 옆에 와 있어.’ 라는 말은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그런 말들은 이제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중략) 용기를 낸 서영이 손을 뻗었고, 오는 내내 그의 따뜻한 주머니 속에 고이 들어 있었을 벨벳 상자가 그녀의 손 위에 놓여졌다. 서영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 벨벳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본문
이들의 시작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모든 이들을 말할 것이다. 세기의 신데렐라의 이야기라는 것은 일단 둘째 치고, 지금 서영의 곁에는 그녀가 한창 어려웠던 시기부터 함께 해준 데이비드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결혼식을 올릴 그녀의 곁에 맴돌며 서영의 모든 것을 흔들려 하는 제이어드는 언니 민영의 남자였다. 그러니까 언니와 동생 간에 한 남자를 두고 벌어지는 치정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렇게 이 짧은 몇 줄의 글로 이들의 이야기를 마주한다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 누구든 되뇌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짧은 이야기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는, 그 어떠한 이야기보다도 희고, 흩날리는 눈꽃이 손바닥 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만 한 아련한 이야기다. 그러니 부디, 짧은 줄거리만으로 이 소설을 판단하지 않길 바라며 부족하나마 서평을 남겨 본다.
서영이 일하고 있는 카페에 매일 똑같은 시간에 들러 오렌지 샐러드를 주문하는 남자가 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잠시 들렀다 가는 그 남자를 서영은 그를 조금 더 눈에 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는 그 어떠한 말도 없이 홀연히 들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반면 서영의 주위를 맴도는 그는 그저 그렇게 그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더 욕심을 내는 순간, 그의 아버지 대에서 일어났던 끔찍했던 일들이 고스란히 다시 일어날 수도 있고 그때의 아득했던 기억이 그의 잔재 속에 남아 있어서인지 스스로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하고 있다.
그래도 아무리 그런 우연과 만남이 반복되어도, 아무리 욕심이 나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버틸 생각이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여자인 것 다 아니까,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여자이니까 그렇게 놔주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혼자만 그 여자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의심이 들어서….(중략) 그렇게 그가 오랫동안 서영을 바라봤던 것처럼, 똑같은 눈동자로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던 그때부터. 마치 그가 감히 바깥으로 내놓지 못하고 깊숙이 담아만 두고 있던 기도에 화답하는 것 같았던 그 눈동자. –본문
계속된 우연이 겹쳐질수록 어느 새 서영은 제이어드를 향한 마음이 무섭게 자라게 된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그와의 인연은 그저 스쳐가는 잠시의 바람일 뿐이고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그는 이미 언니의 남자였을 뿐만 아니라 언니는 현재도 그에 대한 애정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같은 건물 안에 그와 마주치는 순간들이라든지, 남들처럼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스스로를 체념시키고 있다. 이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서영은 데이비드가 청혼을 하는 때에도 아주 잠시 멈칫 하기는 했지만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알고 그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이어드와는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너 못 보내.” 아무리 해도, 네가 지워지지가 않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네가 없이는 결딜 수가 없어. 그 말은 그렇게 들렸다.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다 이해했다.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간신히 서 있던 제이어드가 서영의 품 안으로 무너져 버렸다. –본문
세상에서 금기 시 했던 이 모든 것들을 그저 한 순간에 녹아내려 버렸다.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함께 하기 위한 가시밭길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선택이 그들에게 어떠한 목을 죄이게 될 것이며 주변 이들로 하여금 얼마나 큰 파장을 일게 할 것인지. 하지만 지금 이 둘은 함께하고 있었고 그렇게 서로가 원하는 자리에서 마주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함께하는 그들을 보면서도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인 것은 이들의 사랑이 사랑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이어드의 아버지 대에 있었던 일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이 둘이 함께 하기 위해서 숨어 지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안식처는 제이어드가 마련해준 별장뿐이었다. 그 별장 안에서 오롯이 제이어드를 가질 수 있었고 오롯이 서영을 안을 수 있었던 그 공간 안에서의 시간을 넘어 제이어드는 이 시간이 영원이 지속될 수 있도록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서영은 그 순간, 자신이 떠나야 하는 시기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얀 눈 위에 아들이 길게 누워 있고, 새빨간 피가 아들의 머리에서 흘러 눈을 적시고 있었다. 아들이 제 할아버지처럼 심장이 약하다는 게 떠올랐다. 그런데…. 아들의 표정은 지극히 평안해 보였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휴가를 떠나기 전, 사고를 조심하라던 사라의 말에 느긋하게 대꾸하던 아들의 웃음과 농담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다. ‘혹시 압니까? 운이 좋아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릴지..….’ –본문
누가 누구를 먼저 만났고 그 이전의 시간들이 어찌되었건 간에 그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그 둘에게 가혹하리만큼 세상은 그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제이어드는 스스로 자신을 부숴버릴 결심을 하게 되고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산산조각 낸 그 순간에야 서영과 제이어드는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400여 페이지를 그야말로 3시간 정도 만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아련한 그들의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머금고서 겨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폭설이 쏟아지던 날 마주했던 그 날의 만남이 이 엄청난 오늘을 만들어 냈다니. 눈꽃이 흩날리던 그 날의 풍경이 아직도 머리 속을 맴도는 듯 하다. 투영하면서도 건드리면 사라져 버릴 그들의 이야기에 모처럼 가슴이 따뜻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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