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똑같은 일상인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기쁨, 슬픔, 회한이나 연민 등 다양한 감정들이 한대 섞여 있다. 그저 무난하게 어제를 지나 오늘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계속 변모하게 되는데 ㄱ부터 ㅎ까지 100여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황경신의 <반짝반짝 변주곡>을 보노라면 언젠가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라던가, 미처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면서 변화 없는 일상 속에서는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는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남자가 여자를 알아온 기간만큼 나도 그녀를 알아왔다. 물론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으니까, 남자는 내가 모르는 그녀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알고 있었겠지만, 이제는 다 소용없게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게 되면, 여자는 남자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게 말한다. 나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본문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한 연인의 결별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마치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책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연인 사이에 제 3자였던 저자는 그 둘 모두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유효기간이 소멸되어 버린 지금 여자는 모든 것을 알았다며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고 남자는 털썩 주저 앉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 글을 뒤로하고 있는 그들의 실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저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아 끝났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더 이상의 미련도 없이 그저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거니, 라는 마음으로 사는 그들을 보면서 한때는 하나였을 그들이 이제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들을 보노라면 왠지 애잔함이 밀려든다.
“가장 화가 나는 게 뭔지 알아?”
내가 말했다.
“너희들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야. 순간적으로, 충동적으로, 막무가내고,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아무 곳이나, 아무 생각 없이 들이닥치지. 그리고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거야. 가장 기가 막히는 게 뭔지 알아?”
종소리는 듣고 있다는 표시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다는 거야.” –본문
사랑을 시작할 때는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그 녀석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대체 사랑을 마주하기 전까지의 삶을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전후의 상황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데, 일명 종소리를 내고 있는 이 사랑에게 묵직한 아픔을 데여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 읊조림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될 것이다. 어디서 오는 지도 모르게 마냥 등장해서는 간다는 말도 없이 혼자 떠나버리고 마는 이 종소리는 곁에 있는 순간마저도 괜히 불안에 떨게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더듬어볼 때, 우리가 새긴 마음은 이미 지워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지워지고 사라진 흔적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그토록 살아 퍼덕이는 생명이었다는 것, 그래서 바람에 쓸리고 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단 하나의 진실이리라. –본문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사랑에 대한 단상들에 눈길이 계속 쓰인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지 않은 단상들을 마주하면 할수록 그가 보여주는 독특한 접근들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로서 매 순간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저번 주 1등 복권을 내밀며 다 괜찮아, 라고 말하던 그 남자의 이야기는 진짜였을까, 라는 호기심에서부터 ‘못된 여자’를 만난 이들을 위로해주며 다니는 모습까지. 저자는 그야말로 팔색조 같은 모습으로 이 안에서 무궁무진하게 변신하고 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꽤나 많은 책을 읽은 느낌이다. 실재와 허구 그 사이의 경계에 있는 리듬에 빠져들어 금새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