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외국에 살다 왔다는 이야기를 하노라면 나는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한다.나에게 한국을 넘어선 다른 나라에 산다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고 기회만 된다면 어디든 나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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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디든 나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엄마의 도쿄>는 타국에 있는 그 누군가는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실상 그들의 꿈인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20여년 동안 살았던 도쿄라는 곳을 나는 막연히 꿈에 그리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살아남아야만 하는 공간이었으며 타인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배경이라면 실제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경보다도 오늘을 살아야 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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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녀 역시 왜 도쿄에서 사는 건가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저 살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디에 산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도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오래 전 돌아가시고 난 후 여자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의 결정으로 도쿄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것이 벌써 20여년의 시간이 지나 어머니는 떠나 보낸 그녀가 홀로 남아 그 때의 기억들을 이 책 안에 담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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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은 아빠가 떠난 그 순간이 아니라 남겨진 후,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다하리라 마음먹어야 했던 그때였다. 요요기 공원의 하늘과 풀과 나무를 보면서 엄마는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의 구차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요요기 공원은 두렵고 불안한 장소였다.
같은 도쿄 하늘 아래 같은 장소지만, 엄마와 나의 기억은 이렇게도 다르다. 나는 요요기 공원의 그 널찍한 품을 엄마가 이해하지 못해 서운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속내를 알아주지 않아 섭섭했을까? -본문
여자 혼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20여년의 세월에 대해서 몇 줄의 이야기로 그녀의 어머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그녀가 살아온 삶을 어떻게 다 담을 수 있겠는가. 그 때 당시의 그녀의 막막함과 두려움,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증은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몸안에 축적되어 있다 암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다.그녀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여 아이들과 함께 건너 온 시간 속에 이제 홀로 남은 그녀의 딸인 저자는 엄마와 함께 걸었던 거리나, 음식점들, 같이 걸었던 여행지나, 작은 소품들 속에서 엄마와 함께한 기억들을 들려주고 있다.
정이 많아 어디를 가든 누군가를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챙겼던 엄마가 대체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병을 앓아야 했을까? 만일에 엄마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병으로 갚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이었을까? 엄마와 나는 암이란 병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수술 후 엄마는 점점 쇠약해졌다. 나모다 빨랐던 걸음걸이가 점점 지치고 있었다. 지유가오카에서 쇼핑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조금만 걸어도 가쁜 숨을 내쉬었고, 물 없이는 오분도 채 머물지 못했다. -본문
처음 내가 이 책을 마주했을 때는 '도쿄'라는 단어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바라보려 했다. 스무해 동안 도쿄에서 살았다는 그녀들이 있는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면 그녀의 이야기들을 따라 가면 갈 수록 나는 도쿄는 잊어버리고 그녀들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춰 바라보게 된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남겨 놓은 추억들을 따라 가는 동안 잔잔하지만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과 그리움을 마음껏 누리며 어느 덧 도쿄 안에 스며드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