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10여년 전의 나의 모습으로 현재의 내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라면 내가 기억하는 나는 스물 아홉 살의 나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지금 나는 세 번을 지나왔다. 10대와 20대와 30대의 모습의 나는 각각 다른 사람이라 느낄 만큼이나 급변해 왔다고 생각이 드는데, 갑작스런 사고로 눈을 뜬 앨리스는 현재가 아닌 1998년도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현재의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남편인 닉과는 이혼 소송 중에 있으며 그녀의 곁은 닉이 아닌 도미니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눈을 뜬 지금, 기억하는 것은 ‘건포도’라 부르던 뱃속에 있던 아이와 알콩달콩 사이가 좋던 닉은 물론 그녀의 언니인 앨리자베스와도 살갑게 지내던 기억뿐이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잡을 수 없는 현재라는 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들에 대한 기억. 그것이 인생이다. –본문
첫째를 임신했던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는 앨리스에게 매 순간은 당혹스러움과 혼란 그 자체이다. 어찌되었건 그 아이들의 엄마라는 사실은 변함 없는 것이기에 그녀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개성 강한 아이들의 모습은 마주할 때마다 생경함 그 자체이다. 특히나 톰이 “여자는 들어올 수 없음. 그랬다가는 죽음임.” 이라는 그의 방문 앞에 쓰여진 문구를 보면서 그녀는 조용히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가끔은 행복해지는 것이 정말 쉬웠다. 하지만 정말 노력해야 할 때도 있었고 노력 자체가 바보 같고 의미 없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닉이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데 왜 도미니크와 함께 하지 않았는지 생각하며 한밤 중에 깨어나 잠을 못 이룬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순간들도 있었다. –본문
오롯이 둘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닉과 앨리스의 문제를 이렇게 다시금 마주하게 되면서 그 안에는 아이들도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저 어른들의 문제이고 아이들을 그에 따르는 것이겠거니 했지만, 그 안에 아이들은 이미 훌쩍 커버린 상태였고 그들 나름대로 생각도 있고 그 안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들도 스스로 배워가고 있었다.
스물 아홉 살의 그녀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의 모습들이 있어 인간적인 모습들이 느껴진다. 10여년지 지난 ‘새’앨리스는 그야말로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기억을 잃기 전 그녀는 완벽했을지 모르지만 가정은 조각조각이 되어 모두에게 아픔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면 기억을 잃어 29살이 되어버린 예전 앨리스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찾아가게 되면서 그 안에 있는 진정한 가족이란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이어지게 되고 이상과 현실 속에 괴리에 대해서도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있다.
이 책 안에 오롯이 앨리스와 닉이라는 가정의 모습만이 담긴 것은 아니다. 한 때는 그 누구보다도 친밀했던 언니의 엘리자베스는 무수한 시험관 아이 시술을 받았지만 매번 실패를 하게 되고 그 고통을 느껴야 했던 그녀는 동생일 앨리스를 바라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만 가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만 같은 그녀에게는 도무지 드리우지 않는 새 생명의 축복은 그녀에게만큼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한 그녀들의 엄마와 앨리스의 시아버지와의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우리의 심장은 여실히 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앨리스의 이웃인 프래니 할머니의 블로그는 일상 속에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주변 이들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하며 풍덩, 하고 이야기에 빠지게 만든다.
누군가 바로 옆에 떠 있었다. 앨리스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 앨리스를 웃게 만드는 사람. 앨리스와 똑같은 식으로 페디큐어를 바르는 사람. 그 사람이 엘리스에게 발톱은 모두 다른 색으로 칠한 발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나른하고 만족스러웠다. –본문
어찌 보면 ‘기억상실증’이란 진부한 구조 속에 이 이야기를 담았기에 독자들이 시큰둥하게 느낄 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다시 되찾게 되는 가족과 사랑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녀가 되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며 그 안에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은 무엇인지, 10년 전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아야겠지만 그녀를 통해서 나는 10여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게 된다. 아마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현재의 내 모든 것들에 권태를 느끼며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될 때, 이 책을 다시 한번 마주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