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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가 넘어서까지 내일의 출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렇게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읽어 내려가서는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는 무언가 몽롱함에 취해서 선뜻 잠에도 빠져들 수 없었다.
세상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내는 것들 역시 다양한 빛깔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는 있지만 그 동안 보거나 들어왔던 것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것들을 마주하면 또 멍해지곤 한다. 처음 초록색으로 칠해진 것인지 아닌 것인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던 그 울타리에도 한때는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던 찬란했던 그들의 사랑은 이제 아스라히 사라져 한줌의 재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진 듯 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밀리어 에번스를 보면서 그녀의 삶에 대한 약간의 동정을 갖는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저 억척스러우면서도 평이하지 않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를 꼬마야, 라고 부르던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그녀는 카페로 번창해 맞이 않을 그 공간을 지키며 술을 주조해 팔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의술을 행하기도 하고, 그러다 뒤틀리는 것들이 있으면 소송을 즐겨 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첫 인상은 무언가 억새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꼽추인 라이먼에게 말이다. 180cm가 훌쩍 넘는 어밀리어가 꼽추를 사랑하게 되다니. 그저 머리 속에 그려보아도 과연 이 조합에 대해서 쉬이 그려볼 수 없는 그 순간, 그녀는
“라이먼 오빠, 그냥 마시겠수, 아니면 중탕해서 따뜻하게 마시겠수?” “글쎄, 어밀리어, 너만 괜찮다면……” (중략) “괜찮다면, 데운 걸 마실래.” –본문
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처음으로 여자로서 빛이 나는 시간들을 보낼 것이라는 결심도 없이 너무도 태연하게 이전과는 다른 어밀리어로 살고 있었고 라이먼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는 되려 꼽추인 라이먼 앞에서는 더 작아지고 있었고 오히려 라이먼이 그녀보다도 더 큰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라이먼에게 이전에 어떠한 연애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밀리어 애번스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있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열흘 간의 지독했던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때로, 불행한 어린 시절 때문에 모든 여인들의 삶을 뒤흔들고서는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그야말로 나쁜 남자 마빈 메이시와의 결혼 생활 때를 의미한다. 어찌하여 마빈이 어밀리어에게 홀딱 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상대가 원하든 원지 않든 큐피트의 화살은 마빈에게서 어밀리어에게 향하게 되었고 어밀리어는 꼽추 라이먼에게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결혼 생활이라고 말하기에도 껄끄러운 그들의 열흘 동안의 기록은 차마 눈뜨고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마빈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가까이 할 수도, 가까이 하면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으며 그녀에게 주기 위해 고른 선물들은 그 날 저녁 그 카페에서 다시 판매 되었으며 심지어 결혼식 장에서도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귀찮게만 느껴졌으니 이들의 결혼은 오롯이 마빈을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마빈을 철저히 무너뜨리게 만드는 단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에 드러난 사랑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본문
그렇게 세월이 흘러 마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으며 라이먼과 함께 하는 어밀리어의 카페는 활기를 되찾아 마을의 안식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아이들, 심지어 이웃 동네의 사람들마저도 찾아서 올 정도로 유명해진 그 곳에서의 행복은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한 것들이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문제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들이 그때 주고 받은 시선은 마치 두 명의 범죄자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는 그런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러고는 붉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왼쪽 어깨를 으쓱하더니 등을 돌렸다. 길을 따라 내려가는 남자를 보는 꼽추의 얼굴은 아주 창백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꼽추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본문
늘 꼽추의 뒤를 따르던 어밀리어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는 라이먼. 심지어 어밀리어가 좋아하다 못해 그녀가 모든 것을 꼽추에게로 주게 만들었던 표정이나 행동들을 라이먼은 마빈 앞에서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금 엇갈리는 이 애증의 관계는 모든 것들을 침식시키고 있었고 이 모든 관계를 종식시키고 생존을 위해서는 어밀리어와 마빈은 그들에게 드리워져 있는 악연의 끈을 끊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다시 황량해진 마을과 카페, 그리고 어밀리어를 보면서 과연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에 멍하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마빈과 어밀리어가 이러한 관계로 밖에 잠식할 수 없었던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물론이고 라이먼과 어밀리어의 관계도 이토록 어그러질 뿐만 아니라 결론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었던 것 마저도 어느 정도의 애증이 남아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해 본다.
사랑에 관해서 그 누구도 최종적인 판결을 감히 내릴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나는 이들에 사랑에 대해서 무어라 왈가왈부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러한 이들도 있었다, 라는 한 조각의 사랑이 있었음에 대해서 알게 된 그것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덮으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