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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책을 읽어내려 간 듯 하다. 알콩달콩한 이야기들을 마주하면서 ‘설블리 공주’라는 캐릭터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심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도사 배추도사’가 옥신각신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나 ‘은비까비’가 구름을 타고 다니며 들려주었던 이야기처럼,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이 곳의 시간을 잊은 채 천상의 시간을 보낸 듯, 금새 읽어내려 갔다.
신화이든 선계이든, 인간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누군가를 시기하고 음해하려는 시도들로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옥황상제의 바람기가, 아니면 그의 편애가 이 모든 소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데, 한 남자로서 그를 바라본다면 미움이 가득한 분노로 바라보겠지만, 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근원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바람 잘날 없는 옥황상제에게는 세 명의 부인과 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공주인 설화를 애지중지하며 바라보고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형제 혹은 자매간의 부모에 대한 사랑의 갈망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특히나 셋째 정연이 오랫동안 흠모해 오던 풍대군과의 연문설이 터진 지금, 정음은 동생 정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설화와 아버지 사이를 이간질시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만큼 언니들에게 소외 될 수 밖에 없었던 설화에게 정음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황후화’를 대신해서 찾아다 줄 것을 부탁한다. 백 년에 한번 핀다는 그 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꽃이다. 황금줄기에 비단으로 된 꽃잎과 꽃술에 진주가 박혀있다는 그 꽃이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설화는 서먹서먹한 언니들과의 관계 회복과 아버지를 위한 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바로, 황후화가 있다는 황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한편 인간계에서는 폐병으로 더 이상의 치료도 잘 듣지 않는 황자인 태율이 황산에 요양 차 지내고 있는데 황후화를 찾으러 온 설화와 황자인 태율은 황산에서 처음 마주하게 된다. 로맨틱한 첫 만남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그와는 정 반대로 코믹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마주하게 되는데, 그 모습마저도 귀여운 것이 달달한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기대감으로 열심히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헌데 이렇게 이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몰래 소피를 보고 있는 소년과! 설화 자신도 지금의 상황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당장 도망가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태율이 놀라 내지른 말을 냉큼 주워 들었다. “아, 그럴까? 그럼 우리 둘 다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고 가는 거야! 알았지?” 소년의 말에 좋아하며 재잘거리던 설화의 입이 방정이었다. 그냥 가면 될 것을 괜히 ‘아무것도 못 본 걸’이라는 말을 꺼내어 순수하고 순진한 소년의 얼굴에 불을 지피고 말았다. “뭘 못 봤다는 거야!” –본문
병약했던 황자 태율은 설화가 건넨 천도를 먹고서는 점차 기력을 회복하게 된다. 황자인 그를 너무도 업신 여기는 설화의 존재에 대해 알쏭달쏭하게 되지만 자기도 모르게 점점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그를 보노라면 이들의 로맨스가 어서 빨리 전개 되기만을 재촉하게 된다.
운명의 실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해. 그 운명의 길이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뀔 수 있지. 수십 수백개의 실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실을 만들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해. 인간들의 운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섬세하고 복잡하지. 그러면서 단순하기도 해. 실상 운명은 그 인간의, 인간사의 밑그림만 보여줄 뿐이야. –본문
나의 바람과는 달리 황후화를 찾아야 하는 설화는 구월산으로 떠나게 되고 구월산의 산신 현오를 만나고 신계에서 춘려를 만나는 등, 그녀에게는 잠깐의 시간들이었지만 인간계에서는 이미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리게 된다.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했던 설화가 갑작스레 사라지게 되면서 태율은 그녀를 찾아 틈틈이 황산을 다시 오르고 있었으며 그 시간의 간극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남자답게 변모해가고 있었다.
한편 옥황상제는 그제야 막내 딸 설화에게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을 알게 되는데 각자가 가진 운명의 실타래는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기에 그는 막내딸을 위해 백호 함에게 자신의 딸을 부탁하며 유유히 그녀의 행보를 바라보고 있다.
입맞춤만큼이나 숨 막히게 아름다운 태자의 얼굴에 설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 이마 위로 태율의 촉촉한 입술이 내려왔다. 이마, 콧등, 눈썹 위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점점 다시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태율이 입술에 술이 담겨 있나 보다. 왜 점점 머리가 몽롱해지는 거지? 설화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술에 취한 듯 아찔해지는 머릿속이 그녀를 화염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손길이 어느새 그녀의 잠자리 옷을 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의 입술에 취해 있었다. ‘아아, 이것이 풍대군이 말한 남녀의 운우지정인가?’ 구름 위를 밟는 것과 같다 했다. 설화는 어쩐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문
신계든 구월산이든 황후화를 찾을 수 없었던 설화는 황산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녀를 찾기 위해 태율이 만들어 놓은 황후화는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며 황궁으로 들어간 설화는 그간 태율이 준비해 놓은 대로 황태자와 황태비자가 되게 된다.
너무나 쉽게 이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진행 되는 것 같았지만 그들에게도 비운의 장막들이 하나 둘씩 드리우게 된다. 태율을 해하기 위해 20여년 전부터 준비되었던 음모가 이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오게 되고 그 동안 그들이 쌓아 놓았던 인연과 지혜를 이 어려운 순간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로맨스 소설을 읽은 듯 하다. 다시는 어디 가지 마.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나는 네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라는 태율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며 마치 나에게 들려주는 달콤한 고백처럼 들리는 이 소설이라면, 싱숭생숭한 겨울과 봄 사이의 계절을 보내기에 충분할 것만 같다. 얼어버린 마음을 녹여주는 이 책이, 그리하여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알려주는 이 책이 고마운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