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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란 대문호가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남길 정도로 자신 스스로 호평을 했던 작품을 이제서야 마주하게 되면서, 아니 이제서야 그의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책을 읽기 시작한 나의 독서 편력이 얼마나 심각한지와 더불어 여전히 읽어야 할 고전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에서, 부끄러우면서도 그래도 이제는 톨스토이의 <부활>만큼은 읽어보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안고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2권의 책을 마주하기 전에 읽어내려 간 줄거리를 보면서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만 가득 차 있었다. 독자를 넘어 여자이기에 그가 본능에 의해 취하고 버렸던 여인 카튜사가 결국은 창녀로 전락하여 결국은 나락으로 떨어짐에 따라 감옥에 갇히게 되고 상인 독살 혐의 재판에서 카튜사를 만나게 되어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너무 쉽게 용서를 구한 듯한 그가 원망스럽게만 보였다.
이전과 같이 책을 읽기보다는 검색창에 줄거리를 보고 말았다면, 이 막장 드라마와 같은 내용들을 보면서 말도 안돼, 라며 그저 지나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2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서서히 진행되는 이야기들을 따라 가다 보면 카튜사는 물론이거니와 네흘류도프의 의식 흐림에 대해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네흘류도프의 고모들이 수양딸처럼 키워온 카튜사를 그는 단지 그의 욕망에 젖어 취하고 만다.신분 체제가 뚜렷했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고모들의 수양딸이라고는 하지만 어찌되었건 사회의 하위 계층에 분류될 수 밖에 없었던 카튜사로서는 불러오는 배를 안고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녀의 아이가 별 탈 없이 자라줬다면, 네흘류도프를 사랑했다고 믿었건 카튜사는 어떻게든 살았을 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이마저도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점점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었으며 결국 다시는 마주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들은 법정에서 한 명은 죄인으로, 한 명은 배심원으로 마주하게 된다.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에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자아가 있었다. 하나는 남에게 행복이 되고 자기에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는 그러한 행복만을 찾는 정신적 자아였고, 다른 하나는 오직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그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의 행복까지도 능히 희생시킬 수 있는 동물적 자아였다. –본문
사실 이 상황만을 두고 본다면 네흘류도프와 카튜사는 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범한 뒤 별 다른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네흘류도프가 카튜사를 법정에서 마주하면서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는 장면들에서, 어찌되었건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서 변모하려는 그를, 처음의 원망은 접어두고 노력해가는 그를 조금씩 받아들여야 했지만 처음에는 이 모습마저도 왠지 얄밉게만 느껴졌다.
카튜사의 실형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는 단초가 되었으며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야 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그곳에 따라가면서까지 그녀의 삶을 어떻게든 다시 구원하려 하고 있다. 자신에 의해 망가졌던 그 시간들을 지금에라도 다시 되돌려 보려 하는 그의 모습은 카튜사와의 결혼을 결심하게도 하지만 이 결심마저도 계속 흔들리는 모습에서 처음과 같은 마음이었다면 네흘류도프를 미움만으로 바라보아겠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용기의 발현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특히나 주변 이들의 반대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위치 등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어쩌면 나와 비슷한 그의 모습에서 점차 그를 이해하게 된다.
세상에서 중요하고 훌륭해 보이는 일은 모두 하찮고 보기 싫은 일들이며, 눈부시게 빛나고 사치스러운 것은 모두 여러 사람들에게 아주 당연한, 옛날부터의 죄를 감추는 것들이다 –본문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도중 속출하는 사상자들을 보면서, 과연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죄인이며 그 누가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이들인가, 에 대한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과연 정의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이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를 보면서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다시금 바라보게 된다.
이전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이 세상에 대해 그럭저럭 안주하고 있었던 자신이 카튜사를 권력의 힘으로 취하고서는 권력의 힘으로 덮었다면 세월이 지나 카튜사를 마주한 네흘류도프는 이제서야 다시금 세상 속에 자신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색안경을 벗고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범죄인이라는 사람들을 처벌해왔으나 그렇다고 죄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진화된 범죄가 드러나고 있다. 부패한 사회 속에서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단종되어 지던 그들의 사회를 그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함되어 있던 네흘류도프가 눈을 뜨게 되면서 성경을 빌어 진정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그 아련한 노력들이야 말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누구를 통한 부활이 아닌, 나 스스로 만이 부활의 활로를 만들어갈 수 있으며 사회를 변모할 수 있다는 그의 작은 발걸음들을 보면서 나는 그에 대한 미움을 서서히 지우고 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세상을 목도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