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인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새하얀
순백색과 같은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들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너무 하얗다 보니 그
어떠한 이물감도 느껴질 수 없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 안의 이야기들이 아련하면서도 구슬프게
느껴져서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눈물이 가득 맺히곤 하는 것이 김하인,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아역
배우로 오랜 동안 브라운관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아역 이미지를
탈피하는 그 과정이 쉽지 않다고 한다. 마치 한 마리의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탄생하기 위해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이 김하인 작가에는 인고와도 같은 작품인 듯 했다.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말 그대로
180도 달라진 이야기와 구성 때문에 아마 그의 이름을 못보고 지나쳤다면 이전의 그의 작품과 이 작품이 동일인이 쓴 작품이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이 김하인 작가를 어떠한 나비로 만들어 주었는가를
떠올려보면 아름답고 성스러운 날개 짓을 하는 나비보다는 왠지 서글프면서도 우울한 나비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가 날기 위해 노력하기 이전이었던
애벌레 시절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기하의 눈에 들어왔던 그만의 팜므파탈인
유인경을 만나면서부터 이들의 삶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선배의 마뜩찮은 부탁에 나가기 시작했던 강좌에서 마주하게 된 유인경을
보는 순간부터, 가시밭 같은 이 시간들이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녀는 금방
새치름하게 삐친 표정이 되었다. 김기하는 눈말 멀뚱거렸다.
그녀 특유의 막무가내식 화법이다. 10대나
30대 여자가 아니면 통용될 수 없는 특권이랄까. 그녀는 애교 섞인 떼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샐쭉거리는 눈흘김이 귀여워서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본문
유인경이 언제부터 이러한 계획을 세웠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누구라도 기꺼이 받길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외모를 이용해 자신은 화려한 세상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 기반이 되는 것은 바로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기하였다.
마치
사마귀의 교배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유인경은 외적인 그녀의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하여 김기하로부터
그녀가 새로운 세상, 그러니까 그녀가 꿈꾸는 집안과의 결혼을 위해서 그로 하여금 베스트셀러 작품을
그녀의 이름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독촉하고 있었고 김기하는 그러한 늪에 기꺼이 빠져들어 스스로 그 구렁텅이 아래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가 가진 알량한
지성과 지혜 몇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쌀알점을 쳐본다 해도 금세 가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벼랑길로 걸어 들어갔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는 자기 주문이었다. 어쩜 이번에는 아내가 모를 수 있으리라, 는 자기 최면 때문이었다. -본문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서는 김기하는 홀로 남겨져 있다. 왜 그가 이
자리에 홀로 서있는냐는 자책보다도 아마도 그는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길을 걸어온 듯 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계획대로 모든 것을 다 가졌던 과연
유인경은 행복했을까? 누군가의 삶을 철저히 붕괴시켜 놓고서 과연 그녀는 웃고 있는 것인지. 표지 속 그녀의 앞 모습을 보고 싶어 진다.
후반부에 가면서 그녀의 작품 속의 일들이 실제로 발생되게 되고 김기하의
선배와의 일들이 또 다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등, 나름대로의 복선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
속에서 과연 김하인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기 고백적인 작품인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과는 급작스럽게 달라진 내용을 쓰고 싶었던 것인지.
책장을 덮고 나서는 은교가 떠오르게 된다. 이적요 작가가 그를 따르던 서지우에게 그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어주게 되고 그리하여 베스트 셀러가 된
작가. 그리고 그 이후 차마 발표할 수 없었던 은교란 작품을 다시 서지우가 훔쳐서 세상에 내 놓은
것처럼. 김하인 작가는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도 나는 그 답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