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아르's Review

 

  

    

 엄마와 무엇을 해 본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그 흔한 장면 중 하나인 목욕탕에 가서 함께 뜨거운 탕 안에 몸을 녹여 본 적도 10여년은 된 듯 하다. 함께 미용실에 가서 랩을 쓰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도, 컴컴한 영화관에서 자리를 헤매며 들어가 앉아 팝콘을 우적우적 먹으며 하던 일들도 나의 기억 속에는 이미 10살 이전의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다.

 언제나 가게를 운영하시던 부모님의 일 때문에 휴가도 가족끼리 함께 가는 것조차도 힘든 일들이 많았기에 엄마와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 제목을 보면서 그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짓는 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아닌 엄마와 함께라는 부문에서 말이다. 여행을 가려고 해도 가게 문을 닫는 것이 녹록지 않았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이토록 오래 함께 한다는 것에서부터 설렘과 부러움이 같이 마음을 일렁인다.

 그저 집을 짓는 과정만을 오롯이 담아 놓은 것이라면 아마도 이 책을 읽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모녀들은, 단지 모녀만의 이야기가 아닌 그녀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딸인 그녀, 그리고 그녀의 아들까지 3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며 그러한 그들의 삶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 미래의 모습들이 한아름 담겨 있었다.

 집을 짓기 위해 함께 하는 예순 넷의 엄마와 마흔 셋의 딸의 이야기를 보면서, 엄마에게도 이 책을 함께 읽어보자 말씀 드리곤 했다. 아직 예순 넷이 되려면 멀었다, 라며 씨익 웃으시던 엄마 역시도 이 책을 읽는 것을 금새 동참하셨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엄마를 떠올렸다면 엄마는 이 책을 읽으며 외할머니를 떠올리시지 않을까 싶다. 엄마의 엄마는 곁에 계시진 않지만, 언제나 엄마의 마음 속에는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딸이 아버지의 집을 짓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함께 살 집을 제일 잘 지으리라고 여긴 사람,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을 찾아가 진정한 자기 집을 지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중략)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음 어딘가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하는 아픔이 아직도 있다. 분노가 섞인, 울분이 있는, 억울함조차 깃든 아픔들 말이다. 하지만 집을 지으면서, 함께 기대면서, 그 아픔에 대해서도 작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집짓기 이야기면서 모녀의 이야기다. –본문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 거주할 곳을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처음에 저자이자 딸인 그녀는 엄마가 당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확고히 말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 안타까우면서도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대체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쉬이 그려내지 못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엄마를 떠올리는 순간, 그 답은 너무도 쉽게 풀리고 만다.

 엄마는 언제나 무엇이 먹고 싶니?’ 라고 물어보시곤 하셨지만 단 한번도 나에게 무엇이 먹고 싶다라고 마침표로 그녀의 바람을 끝마친 적이 없다. 이름만 말하면 뚝딱 만들어지는 마술사인 듯, 엄마에게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쉬이 말하곤 했지만 엄마에게 무엇이 드시고 싶은지는 물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였을까, 몇 주 전 함께 저녁 시간에 만난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는 제안에 집에 밥이며 국이며 반찬이 한 가득 이라며 손사레치는 엄마를 억지로 끌고 신촌 사거리를 헤매는 동안 엄마는 쉬이 당신이 드시고 싶으신 것을 선택하지 못하셨다.

 그렇게 10여분은 헤맨 끝에 냉면을 먹어볼까, 라며 수줍게 이야기하시던 엄마는 젓가락을 다 놓고 난 이후에야 말씀하셨다. 이 냉면 한 그릇을 몇 년 전부터 먹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엄마는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집에 사신 적이 없다. 좋은 집은 언제나 먼 곳에 있었고, 그런 집을 꿈꿀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셨기에, 아예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사셨다. 어쩌면 온돌이 있고 이불이 있는 집만으로도 감사해하셨는지도 모른다.
 
인테리어라고는 어쩌다 길에 핀 들꽃을 꺾어다가 아무 병이나 컵에 꽂아두는 것이 전부였던 엄마. 그런 엄마의 집에 대한 꿈을 눈앞에 드러내는 일은 좀 슬픈 일이기도 했다. –본문

 그렇게 하나 둘씩, 엄마의 동선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엄마에게 필요한 것을, 어떠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이 후에 엄마에게는 쓸쓸한 공간이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에 다락방도 사라지고 드레스룸도 사라진, 그야말로 엄마에게 최적의 공간으로 하여 단층의 소담스러운 공간이 탄생하게 된다. 다만 유리와 문이 가득한, 어디서든 빛을 가득히 담을 수 있는 엄마의 집이 점차 나타나게 되는데 단순히 집을 짓는 과정이 아닌 그 과정 속에서 그녀들의 과거 속 이야기가 현재에 벽돌 한 장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들이 함께할 내일을 그리고 있었다.

 집은 나의 것과 가족의 것이 섞여 있는 곳이다. 간혹 아이 옷틈에 섞인 내 옷을 보거나, 내 양말서랍장에서 튀어나온 아들의 양말 한 짝을 보고 웃음 지을 때가 있다. 특히 아들이 아기였을 때 신었던 아주 작은 양말을 보면, 한순간에 시간은 내가 새댁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던 그때, 서랍장은 고요하게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이미 딸이 마흔을 넘어 중년의 시간으로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눈에는 여전히 딸은 어린 딸인가 보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라고 잔소리를 하시던 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책 속의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서 감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을 하게 된다.

 엄마의 보살핌을 통해 딸이 중년으로 장성을 한 그 시간 동안, 딸은 다시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엄마가 되어 한 아이의 순간순간을 함께해야 하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 시점이 되어서 그녀는 그녀의 엄마를 다시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를 업고 다닐 수 있었을 때를 나는 종종 그리워한다. 편리하게 만들어진 아기띠나 처네보다 아이와 내 몸을 하나로 돌돌 말아 묶는 그 보드라운 포대기를 그리워한다. 얼마나 편안하고 따듯했었는지, 이 아이와 함께라면 세상이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어미에게 새끼란 그런 존재이다. 지켜주면서 살 힘을 얻는 관계. –본문

 

 

 

 이 책 속의 모든 것들을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엄마의 딸로서만 남아있으니 말이다. 아직 가진 것이 충분치 않기에 엄마가 남은 여생을 사실 수 있는 그녀만의 집을 지어드릴 수도 없지만 나는 문득 조금씩이나마 엄마와 무언가를 함께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마주했던 엄마라는 막연한 그녀의 모습이 아닌 진짜 엄마가 원하는 엄마의 소망들을 알아 가보고 싶다는 작은 설렘이자 바람이다.

 나는 과연 엄마와 무엇부터 함께 하게 될는지. 앞으로의 우리 모녀 앞에 펼쳐질 이야기들이 더 늦어지지 않게 시작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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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살아계실 때 함께 할 것들 / 신현림저

 

 

독서 기간 : 2014.01.11~01.16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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