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가장 먼저 마주한 에르미타이다. 중세시대의 암자를 의미하는 이 에르미타는 왠지 모르게 보는 것만으로도 겸허히 바라보게 했다. 몽환적이면서도 주변에 그 무엇도 없는 상태에 오롯이 혼자 이 곳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며 이 야생 속에 홀로 숨쉬고 있는 에르미타를 보면서 이전의 활기찬 그 당시의 모습들을 그려보며 나도 모르게 숙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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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점으로 기록되어 있는 에르미타를 찾아 가는 동안 에르미타만을 쫓는 것이 아닌 그 여정 동안 수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으며 또 생경한 풍경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면서 그저 아름답다 혹은 이 곳으로 떠나고 싶다 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올 한 해를 어떻게 지내왔는가 하는,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만을 골라 여행했고,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거렸다. –본문
하얀 눈으로 뒤 덮인 설원 위에서 그가 가는 길목마다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늑대와 같이 나는 그가 가는 여정마다 계속해서 눈길이 사로잡혀 다른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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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으로 뒤 덮인 설원 위에서 그가 가는 길목마다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늑대와 같이 나는 그가 가는 여정마다 계속해서 눈길이 사로잡혀 다른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네크로폴리스 바위의 그늘진 한편에는 동물의 털을 연상시키는 소복한 이끼들이 돋아나 있었다. 이 이끼들은 기원전 혹은 중세시대에 생을 마감해 바위 안에 안착된 그 누군가의 인체 속에 머물던 어떤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본문
특히나 쿠이야 카브라스를 방문했던 곳의 기록은 송연하면서도 처연함마저 들게 되는 것이 생과 사의 길목이란 이 길과 같이 흘러 가는 시간처럼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는 그들이 걸었을 이 길은 이제는 그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 위에 그가 걷고 있고 그가 걸어온 길을 지금의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이 한 곳의 장소를 통해서 몇 개의 시간이 겹쳐져서 우리는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신 없이 지나갔던 올해를 마무리하며 그저 눈으로 잠시 휴식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펼쳐봤던 책 속에서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으며 바쁘게만 쫓아왔던 한 해의 일들이 하나씩 정리되는 느낌이다. 그리 급한 것도 없음에도 재촉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일상 속에서 잠시 단잠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