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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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스페인하면 정열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투우 경기나 화려한 플라멩코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며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대한 짧은 단상이 내게 떠오르는 스페인의 전부이다.

 무언가 붉은 색의 정열적이면서도 힘차게 돌아갈 것만 같은 스페인에서 저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면서도 묵묵하게 자리를 하고 있는 에르미타에서 안식을 취하고 왔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에르미타는 대체 무엇이며 이곳이 어떠한 곳이기에 순례자들의 안식처라고 하는 것인지. 도통 스페인, 하면 떠오르지 않는 이 조합이 어떻게 풀어나가게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세바스티안이 여행 내내 기다리던 회색빛의 먹구름 떼는 소낙비가 막 쏟아지려는 찰나 혹은 먹구름이 밀려가는 찰나에 종종 마주칠 수 있다. 나는 이 풍경을 세바스티안과 함께 떠났던 에르미타 여행 이후 인식하게 되었다. 그전에 내가 보았던 이 세상 모든 회색 구름들은 그저 다 같은 먹구름일 뿐이었다. –본문

 이 책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저자의 여행길을 함께 하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내게는 스페인이란 붉은 색으로 밖에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게 되면서 이 활발하고 역동적인 전체적인 그림 아래 숨겨져 있는 순백색의 숙연함을 본 듯 하다. 에르미타 여행 이후에야 먹구름 이외의 것을 보게 된 것처럼 나 역시도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눈을 떠 아침을 맞이하고 아침을 먹으며 도란도란 웃으며 출근을 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같은 집으로 향하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할 수 있기에 행복하다는 데이트와 결혼의 차이점을 듣고 있노라면 과연 결혼은 늘 언제나 그토록 달콤한 것일까, 라는 물음이 들게 된다 

 책 속 가장 먼저 마주한 에르미타이다. 중세시대의 암자를 의미하는 이 에르미타는 왠지 모르게 보는 것만으로도 겸허히 바라보게 했다. 몽환적이면서도 주변에 그 무엇도 없는 상태에 오롯이 혼자 이 곳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며 이 야생 속에 홀로 숨쉬고 있는 에르미타를 보면서 이전의 활기찬 그 당시의 모습들을 그려보며 나도 모르게 숙연하게 된다.

 

파란 점으로 기록되어 있는 에르미타를 찾아 가는 동안 에르미타만을 쫓는 것이 아닌 그 여정 동안 수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으며 또 생경한 풍경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면서 그저 아름답다 혹은 이 곳으로 떠나고 싶다 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올 한 해를 어떻게 지내왔는가 하는,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만을 골라 여행했고,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거렸다. –본문

 하얀 눈으로 뒤 덮인 설원 위에서 그가 가는 길목마다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늑대와 같이 나는 그가 가는 여정마다 계속해서 눈길이 사로잡혀 다른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얀 눈으로 뒤 덮인 설원 위에서 그가 가는 길목마다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늑대와 같이 나는 그가 가는 여정마다 계속해서 눈길이 사로잡혀 다른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네크로폴리스 바위의 그늘진 한편에는 동물의 털을 연상시키는 소복한 이끼들이 돋아나 있었다. 이 이끼들은 기원전 혹은 중세시대에 생을 마감해 바위 안에 안착된 그 누군가의 인체 속에 머물던 어떤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본문

 특히나 쿠이야 카브라스를 방문했던 곳의 기록은 송연하면서도 처연함마저 들게 되는 것이 생과 사의 길목이란 이 길과 같이 흘러 가는 시간처럼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는 그들이 걸었을 이 길은 이제는 그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 위에 그가 걷고 있고 그가 걸어온 길을 지금의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이 한 곳의 장소를 통해서 몇 개의 시간이 겹쳐져서 우리는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신 없이 지나갔던 올해를 마무리하며 그저 눈으로 잠시 휴식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펼쳐봤던 책 속에서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으며 바쁘게만 쫓아왔던 한 해의 일들이 하나씩 정리되는 느낌이다. 그리 급한 것도 없음에도 재촉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일상 속에서 잠시 단잠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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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시간 / 김지환저

 

 

 

독서 기간 : 2013.12.28~12.30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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