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것이 오롯이 이중섭 화가,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를 뿌리로 하여 나온 작품이니 만큼 그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이 담겨 있을 테고 그리하여 그 안의 활자들은 그저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 되어 책을 안고 있는 내내 가슴이 절절하고 먹먹해지게 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에 되돌릴 수도 없다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와 그의 환경을 두고 ‘만약에’라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덕혜옹주를 읽었을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였던 그녀가 아스라히 사라져 버린 지금에서야 그녀의 존재를 알고서 안타까워했듯이 이 소설을 통해 이중섭을 만나며나는 그의 삶에 대한 통금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삶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시간들을 보냈던 그의 작품들은 진품/가품 논란이 계속되었으며 이제는 그가 남긴 작품이 작품이 아닌 재산으로서 상속을 가지고 분란이 일고 때론 그를 친일파로서 바라보는 시각 등등 이중섭이란 이름은 그가 사라진 이후에 더욱 가열되는 듯 하다.
천재 화가로 불리는 그의 이름은 나에게는 소박하면서도 정겹게만 느껴진다. 아마도 그의 모든 것을 담아 그렸던 것들이 ‘소’였기에 나는 그가 죽어서도 뼈와 가죽을 남기는 소처럼, 순박하게만 비춰진 듯 하다.
캄캄한 식민국의 남자인 그가 지배국의 여자인 마사코를 사랑하는 사실에, 그 사랑에 회의했고 고개를 흔들었으며 많이 아파했다는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같이 걷고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이 잠을 자면서도 그의 표정 갈피에 설핏 묻어나던 슬픈 눈매를, 공소했던 미소를 때로는 먼산바라기고 그녀를 밀어냈던 그 아득한 소실점의 의미를 그녀는 헤아리지 못했었다. -본문
당시의 시대상만을 보아도, 아니 지금을 기점으로 해서 바라본다고 해도 이들의 이야기는 가십거리이면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뿐만 아니라 당사자로서도 억겁의 고난들이었을 게다. 감히 이 나라를 침범한 자의 딸의 사랑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지. 그들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을지는 몰라도 국경을 넘어선, 식민국과 지배국 사이의 그들의 연은 시작부터 어쩌면 아픈 가시밭길의 시작임을 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사랑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아니 그 전부터 식민국과 지배국이라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로 국가가 대립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아련함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야마모토 마사코가 아닌 이남덕으로, 이중섭의 아내로 살았던 그녀의 손에 이제 이중섭의 팔레트만이 남아 있다. 이마저도 전시회장에 기부하기 위해서 온 그녀는 이곳을 찾으며 다시 그와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헤헤, 하며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그를 보노라면 때론 그 해맑음이 너무 답답하게 다가오고도 한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지냈던 때, 살아남기 위한 그의 무던한 몸짓임을 알고 있지만 남들처럼 조금만 더 약았더라면, 그저 눈에 들어온 것들을 흘리고 조금만 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토록 힘겨운 나날들을 버텨야만 했을까. 너무 사람이 좋으면 주변 이들이 힘들다는 말처럼, 그는 그 나름대로의 신념을 안고 살았지만 나는 그가 조금만 더 모나고 조금 더 때가 뭍어 그만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만 허락된 천부적인 재능과 같이 그의 유려한 성품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하여 소설을 읽는 내내, 허수라는 자의 만행 속에서도 그는 늘 햇살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소의 분신이었을까 화신이었을까. 아니 대향 자체가 소였는지 몰랐다 .슬픈 눈매가 그랬고 숙맥같이 순수하기만 했던 처세의 서투름이 그랬다. 소의 화가라는 선입견 때문은 아니었다. 멀리 던져둔 소실점, 그 슬프고 유순한 순응의 몸짓과 눈의 표정은 바로 소 그 자체였다.(중략) 일본에 있을 때 그는 뼈만 앙상한 소를 그렸다. 소는 소였지만 한국 소가 아니었다. 소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그렁한 슬픔에는 조국의 약탈당한 민족의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본문
그리하여 그는 소를 그토록 그렸나보다. 그에게 어머니이자 민족을 대변하는 상징이었으며 때로는 슬픔을 가득 안은 조국의 모습도 보였을테니 말이다. 그가 그린 소는 그저 한 마리의 소가 아니라 그의 가슴 안에 품은 뜨거운 모든 것들을 담아 그린 것이었다.
그렇게 여린 그가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그 세월동안, 그리움과 아득함에 메말라가는 그를 위해 지인들은 그를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니 가족의 품안에서 웃음을 안고 살길 기원하며 그를 남덕에게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려 버린 관계는 넘어설 수 없는 강이 되어버렸다. 오롯한 사랑으로 시작되었던 관계는 현실이라는 배경 아래서 점점 짓이겨 졌으며 한 예술가로서의 혼과 한 가장으로서의 혼이 뒤엉켜 서로를 가시처럼 찌르고 있었다.
나른한 퇴폐와 무질서와 알코올에 절어 즐거운 건지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그 경계가 흐릿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금 밖에 서 있다는 명징한 깨달음이었다. 그 세계의 가두리로 밀려난 화공이었다. 보이지 않았다. 선명한 형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예술에서 그렇게 강렬하게 표출되었던 형태가 후물후물 지워지고 있었다. -본문
가족의 상봉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만은 이들에게는 그 작은 행복마저도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평범한 삶의 허락되지 않던 이들의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반쪽 인생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던 이남덕은 물론, 가장으로서 이 모든 삶을 지키지 못했던 이중섭은 그대로 또 켜켜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살을 애는 듯한 고통을 주던 시간이 아이러니하게 이중섭이란 화가에게는 생을 걸작을 남긴 시간들이라고 한다. 결국 가족을 애타게 그리다 쓸쓸히 사라진 그는 그의 작품으로서는 더 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남겼다고는 하나 그의 삶은 홀연히 태워버리고 떠나버렸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저 역동적이다, 아름답다 라는 생각만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먹먹함이 밀려온다. <부부>라는 이름을 안고 날개를 펴고 안고 있는 이들은 과연 그곳에서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일까. 천재 화가라는 타이틀을 내려 놓고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이들은 웃으며 지낼 수 있었을까. 읽고 난 후에도 그들의 이야기에 먹먹해져서 무언가 가슴이 툭 하고 내려앉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