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왜 나는 육체 노동자들에 한정하여 그들을 생각했던 것 일까. 마치 피부색에 따라 우위를 나눴던 인종차별의 시대로 회귀하듯, 나는 노동자, 하면 육체노동자만을 한정 지어 생각하고 있었고, 소위 블루 칼라라고 불리는 그들을 화이트 칼라 보다는 하위의 피라미드에 있는 것으로 자연스레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그들 중 한 명이 이런 거대한 르포르타주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거만한 생각에 빠져 살았으니, 참 읽으면서도 내 자신에 대한 책망과 그 동안 그 안일함에 빠져 그것이 진리인 냥 살아온 내가 한심에 보였다.
어느 새 사회 속에서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현장에서 피땀 흘리는 노동자들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그 통속적인 세상에 부합하려 오늘도 수 많은 젊은이들은 책과 사투를 버리고 있다.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부류의 노동인 듯 말이다.
자본주의가 처음 도래했을 때만 하더라도 노동자는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거대한 축이었다. 그들이 없는 세상은 자본주의의 핵심이 빠진 굴레나 마찬가지이므로 소위 그 당시의 노동 계층이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고 그들을 통해서 미국은 바야흐로 경제 대국으로 거듭 날 수 있었으나 이른바 기계화와 산업화를 지나게 되면서 그러한 노동 계층은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닌,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혹자는 그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소위 노동자들이라 불리는 이들, 그러니까 육체 노동자로서의 삶이 싫다면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이 조금 더 열심히 공부를 했어야 했던 것 아니냐며 그들을 채근할 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가 겪어 봤듯이 이수해야만 하는 교과목들이 누구에게나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언어 영역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과목의 점수가 비례하게 나오지 않았듯이, 또 다른 맥락으로는 교과목의 점수 만으로 그들의 인생에 대해 판가름 할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몸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착된 생각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러한 고단한 삶을 지내온 부모님은 그를 자신들과 같은 삶으로 인도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고등교육을 통해 블루 칼라가 아닌 화이트 칼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고 계셨다. 하지만 그는 그의 부모님의 바람대로가 아닌 그의 부모님과 같은 육체 노동자로서의 30여년을 보내게 된다.
경영진 입장에서 노동자가 앉아서 노는 모습은 절대 참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는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직자가 앉아서 쉬는 모습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들이 해고해서 실직한 것인데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사용자의 ‘기계화와 현대화’ 계획의 주목적은 작업 과정을 줄이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를 없애는 것이었다. –본문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는 노동자로서 살아왔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이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듯 했다. 요새는 모든 작업이 기계로 이뤄져 있기에 컨테이너선이든 벌크선이든 신속하고 정확한 작업은 물론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그에 따라 시간이 단축되며 결론적으로는 최적의 비용으로 작동될 수 있는 기계화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의 모습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의 말을 따라 쫓다 보면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자본주의의 기틀에서는 대거 노동자의 투입이 고용인과 노동자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는 행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업화라는 터널을 지나게 되면서 지금까지 함께해 온 노동자들은 일개 부품과 같이 전락하게 되었고 똑같은 부품이라면 조금 더 저렴한 것을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산술적인 계산으로 제 3국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는 메우게 되면서 실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노동자들은 그 자리를 내어주고 길거리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대학 강의 중에서 경제성에 대해 배우면서 기계화와 자동화라는 혁신이 제품 생산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효율성을 증대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 배우면서 그것이 당연한 이치라고만 생각했었다. 왜 한 번도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기계들의 몫을 합당하다고만 생각했던 걸까. 경영이 철저히 수치를 근거로 한 이성적인 영역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기계가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느새 철저히 경영자의 입장에서만 자리하게 된 경영의 방침들을 보면서 과연 노동자라는 계급이 경영자를 통해서 임금을 받는 층만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회사를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들은 언제나 회사의 위기가 들이 닥쳤을 때 인원 감축을 하는 것을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회사 뒤에는 권력이라는 거대한 이익 집단이 그 경영 집단을 옹호하고 있는 터에 실제 그들에게 수 많은 이익을 전달해 준 개미와 같은 노동자들은 속수무책 그들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후퇴 할 수 없는 체스 판의 폰이 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Yes”를 외쳐야만 했던 그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결말은 허망하면서도 서글프기 짝이 없다. 노조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마저도 실제 노동자들을 대변하기 보다는 그 대변을 와해시키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참 인간이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부두노동자들은 ‘한 사람이 위해를 당하면 모두가 위해를 당한 것’이라는 신조를 고수하며, 파업 불참을 가장 괘씸한 범죄 행위라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일부에서는 악명은 높지만 훌륭한 저명인사인 해리 브리지스가 수장을 맡고 있는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이라는 부두 노동자 노조가 있었는데, 이 조직은 1930년대 중반에 선박과 해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민주적인 힘을 합쳐 건설한 조직이었다. –본문
책을 읽는 내내 섬뜩함이 나를 관통하는 느낌이다.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 역이 언제 이들과 같이 필요 없는 계층으로 전락해 버릴 지 모르는 일이다. 블루 칼라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그 다음 다른 집단에게도 이 섬뜩한 칼날이 드리워질 수 있다는 신호와 다름 없는 것이다. 과연 당신은 이 고요한 불도저의 움직임을 그저 관망하고만 있을 것인가? 에 대해 또렷이 생각해보게 하는,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