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 일상의 순간을 소묘하는 80편의 아포리즘 에세이
노정숙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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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담담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다.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닌 그저 툭툭 내어 놓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 하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때론 화가 나기도 하는 모습들이, 휘황찬란한 빛깔을 하지 않고 그저 그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릴 적 추운 겨울 날이면 어김 없이 주머니 속에 손을 깊이 넣고 걸을 때면 외할아버지께서는 '손을 빼고 걸어라.'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가타부타 다른 말씀은 없이 이 말씀만 해주곤 하셨는데 지나고 나서야 그 뜻을 알았다. 그렇게 구부정하니, 종종 거리며 걸어 다니다 넘어지는 날에는 크게 다치기 십상이기에 미리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계속 떠올랐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내내 할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그런 느낌을 받은 듯 하다. 이미 지나왔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미사여구 없이도 고스란히 전할 수 있는 힘. 이것이야 말로 조미료 따윈 필요 없는 엄마의 손맛이 아닐까.

 

 

 

 

휘청거리는 몸 퀭한 눈이 빛나는 아이, 양쪽 허벅지에 노끈으로 묶인 건 청바지, 마른 가지 같은 팔에 감은 두 개의 청바지, 갈비뼈를 셀 수 있을 듯 한 몸을 감을 청바지. -본문

 

 

원 달러! 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 동안 그 뼈대가 드러나는 가난은 희망이 되어 울려 퍼진다.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모습 때문일까.주변에 있는 또 다른 아이는 그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단다.

 

 

 

 

사람들이 사막에서 풍장을 할 때마다 내 앞에서 내 어린것을 함께 죽였다.나는 그들의 표지판이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어린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에인다. 내 눈물을 보며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을 찾지만, 나는 상처에 상처를 더한다. -본문

 

 

 

때로 저자는 낙타가 되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언제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사막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미 낙타 앞에서 새끼 낙타를 죽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어미 낙타는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울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방향을 가늠 하는 것이다. 사막의 나침반을 위해서 자신의 새끼를 잃어야 했던 낙타는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증오를 안고 있었을까. 제 새끼를 지키지 못했다는 회한과 그 슬픔을 어찌 감당했을까.

 

 

 

모든 것이 암울하거나 우울하지만은 않다. 그 안에서 일상 속에 담긴 작은 행복들은 그럼에도 이 세상이 여전히 살만한 곳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있다. 아직 웃을 수 있는 이유들이 있기에 오늘도 사람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보다.

 

 

특히나 '결혼식장에서'라는 내용의 글은 뭉클함이 밀려들었다.

 

노총각과 필리핀 아가씨의 국제 결혼.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일들이기에 이제는 특별할 것도 없을 그 이야기에, 노총각은 때 늦은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졌고 그런 그의 아내가 될 이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웨딩드레스 아래 숨기고 아름답게 걷고 있었다.

 

 

 

신랑에게 주례가 죽는 날까지 남편을 사랑할 거냐고 물었다. 신랑은 신부인 필리핀 아가씨 마틸루에게 더듬더듬 통역을 해주었다. 어린 신부는 커다란 눈망울로 오케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문

 

 

 

여전히 국제 결혼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 나와 우리를 등지고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부부로서 이 자리를 스스로 빛내고 있다.

 

 

 

 

이미 인생이라는 초콜릿 상자는 내게 전해졌다. 그 상자 안에 어떠한 초콜릿이 들었는지는 직접 열어보고 부딪쳐봐야 알 수 있다. 쌉싸름한 맛에 얼굴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달콤함에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상자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고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기, 그리고 나를 응원해 주는 이들이 있기에 나는 어떻게든 이 초콜릿 상자를 안고 계속 나아가 볼 생각이다.

 

 

그래, 맹목의 사랑을 퍼붓는 어미의 품을 박차고 광야로 떠나거라. 거기엔 조건부의 사랑이 기다린다는 것을 잊지 마라. 맑은 햇살도 거친 비바람도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드리울 것이며 네가 미처 이빨을 갈기 전에 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단다. 순하고 착하게 살든, 날 선 맹수로 살든 네 맘껏 나아가 보렴.

 

어쨋거나 네가 웃으면 내 우주가 환하다. -본문



아르's 추천목록

『인도방랑』 / 후지와라 신야저

독서 기간 : 2013.10.12~10.13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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