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구부정한 어깨와 백발머리를 한, 그와 대조적으로 검은색 선글라스에 카디건과 캐리어로 세심하게 색깔을 맞춘. 여기서 함정은 줄무늬 옷을 입고 있는 파자마라는 사실이다. 양로원에서 100세라는 성대한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알란은 창문을 통해서 당신을 위한 생일파티 따위는 버려두고서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게 된다. 대체 왜? 라는 궁금증과 한 세기를 산 노인이 떠나는 탐험과 같은 이야기에 끌려서 집어 든 책은 생각보다 꽤나 두툼하다.
하기야 한 세기를 산, 살아있는 역사와 같은 이야기이니 이 정도로도 부족할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알란을 따라가다 보면 이 두툼함이 그저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고개를 돌려 양로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곳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거처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꼭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죽는다고 하여 문제 될 게 없지 않은가? -본문
1905년에 태어난 알란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와 어린 알란을 두고서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로 떠났으며 그렇게 떠난 아버지는 결국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마 이 어릴 적의 사건은 알란에게 깊은 자국은 남긴 듯 했는데, 말미암아 그가 어느 것에도 소속되지 않기를 원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음식과 술만 있다면 어디든지 ok인, 알란의 과거는 생각보다도 휘황찬란하다. 그는 그저 파자마를 입은 노인이 아니었다.
전쟁이 유럽 전역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대되는 동안 알란의 실력은 나날이 향상되었다. 물론 기껏해야 하급 조수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는 것을 써먹을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거기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흡수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니트로글리세린이나 질산암모니아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아이들 장난감이었다. -본문
어린 나이에 폭약회사에 취직한 알란은 그 누구보다도 폭약 제조에 있어서 두각을 드러낸다. 물기 하나 없는 스펀지를 바다 속으로 던져 놓은 것처럼, 그는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된다.
한 세기라는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 역시 이렇게 많은 인맥을 쌓으며, 수 많은 나라를 누비며 다닐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과 소설에서나마 알라가 해줌으로써 뭔가 통쾌하면서도 유쾌한 느낌이 들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피식 웃으며 읽게 되는 책, 아마 이것이 허무맹랑한 스토리 속에 담긴 힘인 듯 하다.
알란은 자신이 나이가 듦에 따라 순진해지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원한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알리스라는 이름의 저 끔찍한 인간이 자신을 깨우고, 여전히 저 끔찍한 죽이 차려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쩌겠는가.......? 백 살이 되려면 아직 몇 달은 더 남았고,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죽을 수 있으리라. -본문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처럼, 언제나 오늘에 익숙해져서 내일을 보낼 우리에게 알라는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치 그와 같이 살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제 끝났어, 라도 체념하는 그 순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과연 나는 오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묶여 있어야 하는가, 에 대해 읽는 내내 고민하게 만든다. 책상을 팽개치고 어디로든 떠나고프게 만드는 알란의 충동적인 이야기.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유쾌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