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가득 고전 목록을 순서대로 정리해 놓고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그저 눈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서 마치 이것이면 됐다, 라는 듯 합당한 체득을 한 양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을 보냈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 책장의 책들은 고스란히 그 자리를 이탈한 적 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하는 책’ 사이의 괴리. 신간 중에는 당연히 좋은 책도 있지만, 많은 경우 고전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함량을 지녔다. ‘101 파워 클래식’ 연재는, 엮은이의 그런 갈증을 채워 주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본문
읽고 싶은 책들이 한 가득, 그러나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이 밀려있다. 서평도 있고 나름대로 구매한 책들도 있고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이번 달만해도 70여권을 구매했고 30여권 정도를 받고 교환하고 했으니, 한 달여 동안에 욕심을 넘어선 책에 대한 만행을 저지른 듯 하다.
그래, 그런 느낌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그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며 책을 보며 되려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왠지 이 책이라면 나를 구제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과 그런 막연한 기대 때문에 읽어보고 싶었다. 수 백 권의 고전들 속에서도 무엇을 먼저 읽으면 좋을지에 대해, 너무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하나부터 시작하면 나머지 것들도 자연스레 손을 뻗게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응원이자 격려가 필요했다.
시대가 불확실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울수록, 사람들은 ‘근원’을 찾는다.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고전을 그리워하고 다시 찾는 이유는, 결국 고전이 세월의 비평을 이겨 낸 인새의 지혜를 전하고 미래에 대한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본문
고전은 무조건 읽어야 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들이잖아, 그런 것들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읽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어! 와 같이 진부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미 지겹도록 들어왔다. 아마도 이 책이 그런 형태의 것이었다면, 굳이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 그들이 읽어보라고 조언하는 원본을 당장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침반은 방향을 잡고 난 이후에는 그다지 필요가 없으니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만 나아가면 되니 말이다.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을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에 따라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본문
하지만 결론적으로만 말하면 이 책은 37명의 이들이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형태를 빌어 전개되고 있다. 앉자 마자 쏟아져 나오는 한정식 집에 들어서서 어떤 반찬을 먼저 먹을까, 를 고민하게 만들 듯 37명이 선택한 각각의 책을 각자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기에 페이지마다 새로운 이야기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읽은 책이다. 물론 책의 소개가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보다도 그들이 왜 이 책을 선택했는가에 더 초점을 맞춰 바라보게 되었다.
마담 보바리를 두고 사십 대가 되어야 그 문학적 의미가 사무치게 다가온다는 스승의 말씀은 바로 이 작품이 시골 마을이라는 현실을 가운데 두고 여인의 환상으로부터 환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무서운 드라마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무론 이상과 좌절, 환상과 환멸의 드라마가 꼭 중년만의 것일까? 젊어서는 어렴풋한 예감으로, 나이 들어서는 쓰라린 체험으로 우리는 모두 그 드라마의 중인공인 것이다. –본문
마담 보바리의 책도 책장에 고스란히 꽂혀 있었다. 제목이 뭔가 생경해서 혹은 익숙해서, 하여튼 어느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 책을 만났을 때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아직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눈인사 정도는 하는 관계의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마주친 느낌이랄까. 이름만 알고 있는 이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이 마담 보바리를 마주한 때의 모습이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고 줄거리만 읽었다면 또 하나의 막장드라마의 출현이라며 혀를 차고 있었을 것이다. ‘훌륭한 군인’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고전문학이라는 이야기 속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불륜이라는 소재를 보면서 대체 왜 이런 이야기들이 꼭 읽어야만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불륜’이라는 단어에만 한정하여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그 안에 담긴 하나하나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말이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지고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라진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이상 십 대라는 나이는 큰 의미가 없다. 나나 내 자식들이나 심지어 내 부모들마저도, 우리는 모두 똑같이 성장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이제 성장은 평생의 과제가 되었고 그 막막한 불확정성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격려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데미안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본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언제나 옳은 것이요, 진리이다, 라는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혀져 같다는 것을 느껴간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고리타분한 어른들의 생각과 틀을 반대하던 내가 이제 점점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나이가 유일한 무기가 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숫자에만 의존해서 타인에게 큰소리 칠 수 밖에 없는 내가 되기 싫고 두려워서 책을 읽고 있다.
여전히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아직도 나의 세계는 편협하기만 하다. 이제 책을 읽기 시작한 1년차이기에 누군가에게 이 책 괜찮아요, 라고 그들처럼 이야기 하기는 힘들겠지만, 이들이 추천해준 책을 읽어보며 나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