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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의 역경을 닮은 이야기들을 볼 때만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여전히 이 지구상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히듯 착찹한 심정이 들곤 하다. ‘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도 그러했고 ‘우물 파는 아이들’도 그러했으며 이 책 역시 어김없이 안타까움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부터 인간은 계급사회에 종속되어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가를 가르는 것에 연연했던 것일 것일까. 동일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다는 우매한 생각에 빠져서 자행했던 만행들. 노예제도나 우생학 등 이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상들임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잔재는 그 뿌리가 얼마나 깊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카스트의 역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스트는 ‘순수한’ ‘섞이지 않는’이라는 의미가 있다. 애초 카스트는 능력, 일솜씨에 따라 각자 사회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세습적 신분제도일 뿐이다. –본문
이미 법적으로 철폐되었다는 카스트 제도는 인도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병폐로 남아있다. 하기야 브라만 계급에게는 일순간 불가촉천민과 동일한 계급이 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추락의 의미할 터이니 기득권인 그들에게 이 제도의 철폐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식이었을 게다.
무엇보다도 오랜 동안 이 제도가 지속되었던 나머지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 때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왜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만 있을까? 나 역시도 그 곳에서 자고 났다면 모두가 그러하듯 그것이 현실임에 즉시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다른 계급의 인도 사람들과 그렇게 다른가요?”
“그렇단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전생에 별로 좋지 않은 일을 많이 해서 지금 그 죗값을 치르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씻고 좋은 일을 해야 해. 그러면 다음 생애 여배우나 공주로 태어날 수도 있단다. 하인도 많이 거느리고……” –본문
주변 환경 속에 무뎌진 채로 살아간 다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일임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현재의 내 모습 속에 자행되고 있는 오류들을 그저 당연한 일상으로 넘기고 있는 것을 없을까? 오랫동안 자행되어 왔기에 그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고만 있는 것은 아닐지. 시간이 점철되어 쌓여온 제도나 관례들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며 무조건 옳다가 아닌 물음표를 한 번 던져보게 된다.
이 책 속 주인공인 바르티는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아이다. 으레 인도에서는 딸은 결혼시키기 위해서 지참금까지 마련하여 시댁에 전달한 후 그 곳에서 평생을 지내기에 남 좋은 일 시키는 겪이란 말이 있으며 이런 이유로 여자아이를 임신 했을 경우 낙태 수술을 하거나 때로는 버리는 경우도 만연해 있다고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혹은 태어나자마자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여자란 이유만으로 말이다.
특히 워낙 먹고 살기 힘든 탓에 조혼의 풍습도 남아있는데, 바르티의 친구는 이미 결혼을 하여 시댁으로 간 장면이 있다. 친구를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바르티를 보며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시댁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들을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친구 라드히카가 보이지 않는다. 라드히카는 이미 며칠 전에 시댁으로 떠났다고 해싿. 라드히카는 시집에서 무급으로 일하는 하녀처럼 살아갈 게 뻔했다. 시집에 들어가 사는 모든 소녀들이 그런 것처럼. 라드히카를 생각하면 슬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문
곁에 있는 사람들 마저도 불가촉천민이기에 그들이 삶이 궁핍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곳에, 심지어 도움의 손길 조차 아까워하는 그 버려진 도시에 소녀 바르티가 있다. 그저 조금 더 배우고 싶은 욕심이 있는 바르티에게 세상은 그 작은 바람 하나 쉬이 들어주지 않는다.
브라만의 딸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한껏 치장한 바르티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북하니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이다. 브라만이 결혼식에 불가촉천민들을 초대하는 장면에서, 나는 동화와 같은 아름다운 결말을 내심 그리고 있었다. 카스트제도가 사라진 이 곳에 새로운 새싹이 움트는 가보다 하며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다다를 때쯤 마주하는 현실은 역시나, 하는 변하지 않는 거대한 장벽뿐이다.
우리가 다른 가정, 다른 계급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수천 송이의 꽃과 재스민으로 장식한 거대한 저택에서 춤을 추며 먹고 즐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부자들이 즐겁게 파티할 수 있도록 설거지를 책임져야 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금속 접시를 잡고 박박 닦았다. 실망한 표정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접시를 닦는 동안 어쩌면 나를 낳아준 엄마가 특권층에 속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의 나는 특권층의 접시를 닦는 하녀일 뿐이다. -본문
바르티가 얼마나 오랜 동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학교를 다니고 마을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바르티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은 여전히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기에 그녀의 꿈은 그 곳에서는 허무맹랑한 바람으로 일순간에 사그라들지 모른다.
하지만 바르티 혼자만이 아니라 망고 나무 아래 꽤나 많은 아이들이 옹기 종기 자리잡고 앉아 배움이라는 열망을 틔우고 있으니 미약하지만 이 불꽃이 서서히 타오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어린 나이에 삶의 고달픔을 먼저 몸으로 깨닫기 전에 마냥 웃으며 뛰놀고 때론 학교에 가기 싫다며 투정부릴 수 있는 평범한 아이들의 삶을 바르티와 친구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교육과 지식은 모든 아이들에게 그러니까 여자아이에게도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본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