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강렬한 조우로 시작된 이 책은 어릴 때 한 번쯤, 아니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은 생각해왔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놓았다. 바로 나의 불행을 타인에게 전가시킬 수 있도록, 그러니까 불행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기계를 발명한 것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왜 이런 일들은 나에게만 발생하는 건지.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과 시련이 오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놈의 불행이나 심란한 일들은 우편번호라도 부착 된 것마냥 모두 나에게로 향해 올 때. 그럴 때면 누군가와 이 고된 일들을 나누기 위해서 지인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문제들은 오롯이 나를 향해 있기에 그 짧은 통탄의 대화를 지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기 마련이다.
일명 부적응자 클럽에 속한 네 명의 아이들을 보면서 어느 한 집단에서 적응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되는 고정적인 틀이란 생각이 든다.
작곡 실력이 뛰어난 프레드와 발명에 일가견이 있는 에르완, 천체물리학에 재능을 보이는 바카리와 반어법에 능통한 주인공 나까지. 하나하나 그들의 특성을 보노라면 그들은 학교에 부적응한 아이들이 아니라 그 모두가 나름의 장점을 타고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 우리는 하자 있는 아이들로, 말미암아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지 않고서는 그 아이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냉정한 도시 속에서 아이들을 부적응자라 몰아 부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과 불행을 평등하게 나누어 주는 게 딱 하나 있구나. 바로 시간이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십 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른이 되는 것 아니거든. –본문
아이들은 자신들이 한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이 된다. 물론 평등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품는 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들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불행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모두 웃고는 있지만 그 나름의 삶의 무게가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폭행당하는 에르완처럼, 갑작스런 부모님의 실직이라던가. 내가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들이닥치는 불행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된 학교 생활에서 아이들은 이야기 한다. 늘상 인기있었던 사람들은 인기가 있고 활발한 친구들은 활발하고, 이들은 다시 부적응 클럽의 회원들로서 학교에 자리잡고 있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 나름대로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아이들이기에 이 네 명의 아이들은 더 이상 불행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타인이 만든 잣대가 아닌 나를 위한 기준으로 세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