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가책자가 도착했다. 파란아이라는 제목처럼 푸르스름한 느낌의 가책자. 일반적인 책의 느낌이 아니라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대본의 느낌이라 마냥 신기해서 깔짝거리며 보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얼마지 않아 완성된 책이 도착했다.
내가 생각했던 파란아이보다 훨씬 창백하면서도 미소년의 느낌의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가책자와는 또 다른 느낌이기에 낯설면서도 실제로 눈으로 보는 아이는 왠지 더 서글퍼 보였다.
Blue라는 단어에는 파란색이라는 뜻 외에도 우울한 이란 뜻도 함께 있다. 편견 인지는 모르지만 제목만으로 뭔가 어눌한 느낌이 들곤 했었는데, 이 아이가 파란아이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입술이 파랗기 때문이다. 그 어느 곳보다도 얇은 표피 때문에 붉은 혈액이 비춰지기에 붉은 빛은 띈다는 입술이 파랗다니. 웬만큼 체온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잘 발생되는 현상이 아니기에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세상 살다 보면 상식을 뛰어 넘는 일들도 왕왕 발생하기에 또 어느새 수긍하며 읽게 된다.
죽은 누이의 이름을 고스란히 물려 받은 소년은 그 존재만으로 위안이자 슬픔이 되곤 했다. 누이를 닮아가는 모습에 그의 어머니에게는 슬픔이기도 하고 아들을 통해서 딸을 볼 수 있기에 위안이 되곤 했다. 하지만 소년의 할머니는 그런 며느리의 모습이 탐탁지 않다.
그 사이에 있는 소년은 둘 사이의 분란을 조장하기보다는 어느 새 현실과 타협하면서 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의 상상력은 이상한 쪽으로만 발달했는지. 하나를 말하면 열을 떠올리고, 자기 상상에 확신을 더한다. 만일 소년이 도넛을 판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키운 아인데……로 시작해 어쩐지 애를 그렇게 찾더라, 며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중략) 자신들은 꽤나 정숙한 성장기를 보내고 꽤 근사한 어른이 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소년이 보기에는 요즘 어른들이 문제다. –본문
소년과 할머니와의 단조로운 일상 속에 소년의 친구가 등장하게 된다. 그 전에는 몰랐던 소년이 품고 있던 과거, 그러니까 소년이 죽은 누이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모습에 순간 섬뜩함을 느끼곤 하지만 그것 역시 오래가지는 못한다. 친구 역시 자신이 안고 있는 삶의 무게가 버겁기에 섬뜩함은 어느새 현재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지고 만다.
소년의 부모는 택배 일을 하고, 동아의 부모는 자동차 세차장에서 일한다. 누가 더 힘들고 누가 더 많이 버는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몸이 녹초가 되도록 일하는데도 빚이 점점 늘어나는 건 두 집다 마찬가지니까. –본문
언젠가부터 청소년 문학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나이가 어리기에 그들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그들을 위한 이야기에는 일반 소설이나 문학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읽다 보면 그 경계가 사라지는 것 같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가벼울 것이라는 편견은 청소년이란 단어 속에 있는 나이라는 숫자에 대한 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드디어 자신이 안고 있던 허울을 벗어나 다시 한 번 태어나게 된다. 진정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마지막 그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죽은 누이보다도 훌쩍 커버린 소년이 베시시 웃고 있다. 푸른 입술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제서야 처음 본 듯 하다. 청소년을 지나 20대의 청년이 되기까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따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대로 그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보게 된다. 20대의 그는 어떠한 모습일지, 30대에 어떤 모습일지. 소년으로 만난 그는 어느새 내 안에서 청년을 지나 아저씨까지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