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다 띠지 속의 살포시 웃고 있는 그의 얼굴만 보았다면 그리고 제목을 한 번 읽고 내려갔다면 처세술이나 심리에 관한 이야기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강렬한 색채의 책 표지 때문에 눈길이 끌렸던 것을 사실이었으나 그다지 호감을 끌만한 것은 아니었기에 우연치 않게 읽게 된 책 소개글이 아니었다면 영영 그를 못 만났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접해보지 않고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법이지만, 여전히 책을 고르는데 편협한 시각으로 점철된 내게 그 우연한 스침을 통해 읽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해준 그 찰나가 참 고마우니 말이다.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철학자, 뇌성마비인,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지위와 철학자로서의 삶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에 의해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리고 수 많은 아버지와 나름의 철학자들은 주변에도 산재해 있으니까, 보통의 이야기이겠구나 했던 찰나 뇌성마비라는 단어가 불현듯 도드라져 보였다.
그제서야 제목에 담겨 있던, 그저 말로만이 아닌 그가 진정으로 그의 삶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꼭 읽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책을 만날 수 있었으며 읽고 나서는 참 편안해지면서도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뭐랄까, 정말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선 후 꼭 해탈한 사람의 어투 같은 느낌이다. 화려한 수식어나 별 다른 꾸밈이 없지만 담백한 그 문장들이 진한 울림을 전달해 주고 또 생각만큼 쉽게 쉽게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놓지 않고 책에서 눈을 땔 수 없게 한다.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다. 바로 그래서 나는 이를 내 아내라고 부른다.” 제 아내가 실제로 제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만약 제가 “내 아내는 바로 이런 존재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이요, 몇몇 꼬리표로 가두는 것이며, 결국엔 그녀를 죽이는 꼴입니다. 세상의 꼬리표들이 사람과 사물을 가둔다는 걸, 즉 죽여버린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꼬리표를 올바로 사용할 줄 알게 됩니다. –본문
아마 금강경을 혼자 읽었다면, 나는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 그 문장에 잡혀서 계속 고민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그런지 그는 참 쉬우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것들을 이해했는지에 대해 담담히 고백하면서 그 과정을 쉬이 알려주고 있다.
장애를 안고 있던 그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에 대한 원망의 시간도 보냈을 것이다. 끊임없는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그 안에서만 허우적거리고만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금강경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장애를 훌훌 털어놓고 그것에 대한 큰 의미를 두기 보다는 말 그대로 툭 내려놓고 있다. 이는 자신이 처한 상태에 대한 외면이 아닌 오히려 또렷이 그것을 즉시하고 서야 할 수 있는, 알고는 있으나 쉬이 행동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특히나 내가 그였다면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을 그는 이미 해냈으며 그래서 오늘 이 책을 통해 담담히 이야기 하고 있다.
뇌성마비로 인해 오랜 시절 요양원에서 머물러야만 했다는 그에 대한 소개 글 때문에 읽게 되었으나 읽는 동안에 점점 그의 장애가 도드라지기 보다는 오히려 옅어지다 못해 그 흔적들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다. 오히려 그의 앞에 서면 내가 더 문제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니 말이다.
원래도 공상이 많긴 했지만, 작년에 발생한 교통사고 이후 망상이 더욱 심해졌다. 잘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 있어도 어느 새 갑자기 사고가 발생할 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고 괜한 상상의 나래는 언제나 공포로 마무리 되곤 한다. 그런 내 모습을 알고라도 있었다는 듯이 그는 명상에 대해 권하고 있다. 한 마리의 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파랗게 드리워진 하늘을 봄으로써 숨을 고르라는 것이다.
명상 수행이란 텅 빈 상태를 바라보는 일이며, 텅 빈 상태에서 모든 긴장을 이완시키는 거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들을 새를 보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새가 지나가고 나면 항상 광막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지요. 불안과 두려움이란 여전히 그 새들한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은 거죠. 바로 하늘 말입니다. –본문
읽는 내내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장애 때문에 이 책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그는 그것들을 툴툴 털어내고 나서 이미 자유로운 몸인데도 여전히 나는 그를 장애 안에 두고 바라보고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아마 이렇게라도 자신을 마주한 나를 보며 그저 싱긋 한 번 웃고 넘어갈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시작이 어찌되었던 마지막에 되어서 나는 그와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담담하게 그 안에 작은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그래서 다시 웃으며 나아갈 수 있기에 든든한 친구를 곁에 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