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책들에 비해 너무도 긴 서문을 마주하면서, 그래도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금 지나고 나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 하면서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행동을 하는 도중 한숨을 쉬면서 책장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가진 책장 속의 책은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뉜다. 아직 읽지 않은 책, 읽었지만 다시는 보지 않을 책, 나중에 제대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앞의 두 가지 범주는 논외로 하고서 마지막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들로 말하자면, 읽기는 읽었으나 그저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려니 하면서 읽은 것들로 몇 번을 읽어봐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책들로 일부러 그런 책들만 고스란히 모아놨다. 언젠가는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고개를 넘을 것이라는 심산으로 말이다.
그렇게 멍하니 이 책 역시 마지막 범주에 들어가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 범주 안의 저자의 또 다른 책인 ‘자유의지는 없다’가 눈에 띄었다.
지독하게도 페이지마다 왕복해야 했던 그 때의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아, 이 책이었구나. 그를 또 만났구나, 라는 두려움 반 그리고 과연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 반으로 서문을 꾸역꾸역 넘기고 있었다.
서문을 지나 1장의 도덕적 진리에 들어서게 되면서 나는 저자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은 자유 의지라 말 할 수 있겠지만 그 의견에 반대편에 있는 자들에게 쏟아질 비난과 힐난 때문에라도 대게 중화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거침없이 주창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역시 지동설이 옳다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드러내기 그 당시에 풍미하고 있던 거짓이 가득 차 있는 속에 진실이라 일컫는 것을 드러내기 두려워했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샘 해리슨는 그의 의견을 주창하고 있다.
심지어 아홉 살 난 소녀가 의붓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해 쌍둥이를 임신한 경우에도 말이다. 그런데 교회는 인종 학살을 자행한 히틀러 치하의 독일 나치당원은 단 한 명도 파면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뒤집힌 우선순위가 정녕 대안적인 ‘도덕’ 체계의 증거라고 봐야 하는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실체변화의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피임의 ‘도덕적’위험을 말할 때도 분명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 두 영역에서 교회는 세상의 어떤 일에 주목해야 하는지 터무니 없이 혼동한다고 보는 게 맞다. –본문
아직 종교에 대한 개념이 적립되어 있지 않아서 인지 내게 있어 종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다지 관심 영역이 아닌 분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가끔 떠오르는 것은 어찌되었건 잘못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죄책감의 근원 때문인 것 같다.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뚜렷한 종교가 없음에도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양심의 가책과도 같은 그 일말의 꿈틀거림은 왠지 모르게 현세이든 사후이든 영향을 받을 것만 같아 두려워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도덕’적인 관념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은연 중에 만들어 낸 약속과도 같은 것일 게다.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인 제재 조치를 받는다거나 신체의 자유가 사라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닐 지 언정 무언가 내 스스로 께름칙하게 하는 그 근원에 대해 샘 해리스는 양심이나 종교적인 틀이 아닌 과학의 틀에서 도덕을 판단하고 논하려 하고 있다.
대게 우리는 삶의 거의 매 순간 이기적 욕망에 강력하게 빨려 들어간다. 또한 자신의 통증과 쾌락에 대해서는 더는 예민해질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한다. 모르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절규는 가장 극심한 상태가 되어서야 관심을 끌고, 그마저도 곧 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성할 때 선행과 공정성의 천사라 우리 안에 날개를 펼친다. –본문
선과 악이 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는 바라본다. 어떠한 행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샘 해리스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인 ‘도덕적 풍경’에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바 도덕적 풍경은 하나의 산 봉우리를 떠올리면 되는데 봉우리의 높이는 잠재적 행복이고 계곡의 깊이는 잠재적 고통의 크기가 된다. 이 풍경 속의 산 봉우리가 단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인 것은 필시 하나의 문제에 단 하나의 답이 아닌 여러 개의 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에 있어서 이전과 같은 윤리적인 시각이 아닌 도덕의 과학을 통해서 그 봉우리들에 대해 탐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내측전전두피질 MPFC의 보다 큰 활성화와 관련됨이 밝혀졌다. (중략) MPFC는 지속적인 현실 감시와도 관련되며, 이곳에 손상을 입으면 지어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즉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공공연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뇌에 어떤 원인이 있든지, 이야기를 지어내는 증상은 믿음의 과정이 맹렬하게 활성화되는 상황에 있는 것 같다. –본문
무엇을 믿는다, 라는 것에 있어 신념이 될 수도 있고 지인이 이야기 하는 속설일 수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에 있어서 믿는 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기저 의식을 가지고 현재 발현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인식하는 행위로서 우리는 대게 믿는 다는 것은 옳은 것으로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믿는 다는 것은 지식이 될 만큼의 확고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잠재한 것이라면 이러한 믿음 또한 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에 이 믿음이라는 것을 뇌의 영역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샘 해리스는 도덕이라는 것은 단순히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탐구의 진정한 영역이라고 믿으며, 문화의 우연성을 초월하여 도덕적 진보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음을 밝힌다. 그는 우리가 ‘행복’이나 ‘웰빙’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가 어렵기도 하고 행복에 대한 회의주의와 마주하기도 한다고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인간의 긍정적 존재 상태를 말할 개념은 없다고 말한다. -본문
도덕, 하면 윤리적인 잣대로 관념에 젖어 혹은 타성이나 종교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색깔로 치자면 도덕은 빨간색으로 무언가 심장과 연결성이 있을 것만 같은 양심의 문제를 파란색과 같은 차가우면서도 냉정한 현실에 대해서만 파고 들고자 하는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이 둘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과학의 잣대로 도덕을 판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신이 대답할 수 없는 몇 가지라는 제목으로 하여 도덕을 판단하려 했을 것이다.
자유의지는 없다, 를 읽고 나서도 그러했듯이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이다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보는 것도 있구나, 하는 또 다른 관점을 배웠다 정도로 만족하련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그 어디에서 도덕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 했을까. 쉬이 읽히지는 않고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안목을 배운 것, 그거 하나면 됐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