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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의 시간은 더디 가는 것만 같은데 어느 새 한달, 두 달이 지나가고 1년이라는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린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왜 나에게만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만 가버리는 것인지 어제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내달리고 있는 와중에 ‘늘 청춘으로 산다는 것을 얼마나 피로한 일인가’ 라며 느긋함을 가져보라고 종용하는 이 책은 청춘이기 때문에 아프고 바쁘다는 다른 책들과는 달라서 인지 눈길이 가고 그래서 읽어보고만 싶었다.
젊을 때에는 모든 일이 급하게만 느껴졌다. 청년기에는 성급함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 마크가 그려져 있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청춘을 과시하면서, 아니 청춘인 척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영원한 청춘”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렇게 달리면 나보다 훨씬 빨리 블리호스에 도착하겠지. 그러나 지금 내게는 서두를 일이 없다. –본문
인공 치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치과의사의 권유에 한 동안 망설이던 저자는 집으로 돌아와 이러한 시술을 행하기 위해서 드는 기간 및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알아보고서는 무엇을 위해 이 치료를 감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는 홀연히 그리스로 떠나게 된다. 젊음을 위해 비용과 고통을 지불하는 대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 진정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나이를 부정하는 유행병에 걸려 멍청한 계산을 한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 ‘청춘을 이식’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겉치레보다는 얼마나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지, 만족스럽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해졌다. –본문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 온통 방부제 같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은 우리에게도 자신들과 같이 영원할 것만 같은 젊음을 가질 수 있다며 수 많은 제품들의 사용을 권유하고 있다. 그것만 있다면 누구든 시간이라는 절대 강자를 넘어설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기야 진시황제 역시 불로초를 탐하였으니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피하고 싶은 절대 절명의 난제인지도 모르겠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20대와의 또 다른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20대에는 후회 없이 살자, 였다면 30대는 내 얼굴에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한 두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있어서 그들의 삶이 드러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어릴 때는 잘 몰랐었는데, 어느 새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화려한 보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들의 얼굴에 담긴 살아온 인생까지도 꾸밀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중력에 저항하듯 보톡스 시술을 받고 자가 지방을 이식 등을 통해서 외형적인 나이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면에 담긴 그들의 인생의 깊이는 여전히 변화가 없기에 낯빛에서 전해지는 그 울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저자의 청춘에서 벗어나 지금의 나를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은 새로우면서도 그렇기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청춘을 벗어났기에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춘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지난날의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에 취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날마다 새로운 물건을 사게 만드는 기이한 경제 사회가 도래하리라고 이미 예견하였다. 최신형 물건을 손에 넣어도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즐거움은 얻을 수가 없다. 에피쿠로스는 “충분한 것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경구로 소유욕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본문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자에 의해 주창되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의 관철은 허겁지겁 앞으로 나아가기에 바쁜 나로 하여금 무엇을 위하여, 왜 그렇게 바쁘게 달리는가? 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일례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기차로 잘못 탑승한 저자와 그의 식구들은 마침 같은 칸에 있던 승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급하니 자신의 정황을 설명하는 그에게 승무원은 기차를 제대로 탈 확률은 반반이라면서 천연스럽게 어디에서 왔는지 등에 대한 잡담을 늘어놓는다.
아마 내가 이 상황이었다면 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내 상황을 승무원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타국에서 내가 가려던 곳이 아닌 완전히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니.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허둥지둥 하고 점점 언성이 높아졌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여유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에피쿠로스의 영향인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는 반대편의 기차가 저자의 가족들을 위해 중간에 그들이 기차를 바꿔 탈 수 있도록 각 기관사들이 역도 아닌 곳에 정차하게 된다. 역도 아닌 곳에서, 단 몇 명의 승객을 위해서 기차 두 대가 멈추었다. 우리나라였으면 가능했을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잘못은 철저히 저자에게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그 누구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다. 제때 움직이지 않는 기차를 비난하기 보다는 그로 인해 잠깐의 여유를 얻게 되었기에 그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살구 밭에서 느닷없이 정차하는 바람에 만찬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관사에게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끽하였는데 그렇게 항의한다면 나의 가치관에 부합되는 것일까?” 그 기차의 승객들은 이처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검토했을 것이다. –본문
저자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느껴왔던 소소한 것들을 나지막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결혼에 있어서 상대방의 조건이 아닌 노년기에 들어서도 이 사람과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부터 친구 없이 혼자인 삶은 그 무엇보다도 황량한 삶이 될 것이라는 등 이미 지나왔던 시간 속에서 그가 느꼈던, 그리고 지금 그리스에서 느꼈던 인생의 크고 작은 걸림돌 혹은 난제들을 쉬이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연륜이 쌓인다고 해서 모두가 느긋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관도 다를 것이며 나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 있어 내가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과 같이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느라 아등바등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면서도 편안해진다. 느긋하게 한 번쯤은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으니 여유를 가져보련다. 어떻게 사는 가가 중요한 것인지 내가 가진 물건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내 삶의 점수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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