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크 ㅣ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무언가를 이해한다, 이해해, 라는 말을 내가 너무도 쉽게 해 왔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주인공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나는 종종 그들을 이해해, 라고 이야기 해왔었지만 실제로 그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로만 이해한다는 그 뻔한 거짓말과 그 거짓말을 기반으로 마치 이해심이 넓은 듯 행동해 온 내 자신의 위선은 마주하며 과연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진퇴양난에 빠져 고심하고 있었다.
첫 페이지를 넘겨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하게 된 그 끔찍한 장면에서 나는 이 책을 덮어버리고만 싶었다. 처음부터 너무 강력한 충격의 파도가 불어 닥치는 한 가운데서 이 책을 덮고 현실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미친 척 계속 가 볼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 이왕 시작한 거 그래도 한 번 가보자라며 내 자신을 다독이며 또 각오를 다부지며 다시 책을 넘기고 있었다.
남녀의 성행위가 포르노로 전락하고 있는 와중에 과연 게이들의 성행위는 변태적인 행위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과연 어느 것이 정상인 것이고 어느 것이 비정상 적인 것인가를 판단하고 그 잣대를 드리울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는 첫 장의 그 장면들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노래방에 도우미로 나가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엄마와, 잊을 만하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로부터, 그리하여 혼자일 때보다도 못한 이 구질구질하고 외롭고 두려운 현실로부터 달아나 살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떠나고 싶었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었고, 하루빨리, 한시바삐, 아니, 지금 당장 떠나고만 싶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이 집을 찾아왔다. 이따금 한 번만 오는 주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집에 찾아올 때마다 엄마에게 항상 “성재는?” 하고 물었다. 그것은 나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물음이었다.- 본문
폐물, 쓰레기라는 의미를 지닌 정크를 제목으로 칭한 것은 주인공인 성재 자신이 자신을 정크와 같은 쓰레기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있지만 내 아버지가 아니었고, 애인이 있지만 내 애인이 아닌, 실상 그는 존재하고는 있지만 세상은 그를 비존재라 부르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이다. 함께 숨쉬고 있지만 마치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부끄러운 듯 혹여 드러날까 두려워 꼭꼭 숨겨 놓고서는 ‘그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라며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외면하고 있었고 선을 긋고서는 ‘넘어 오지마, 여긴 우리들의 세상이야’ 듯이 초등학생 때 했던 책상을 선점하기 위해 종종 해 왔던 놀이처럼 현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은 비정상적인 카테고리로 묶어 나와는 ‘다른’ 이 아닌 ‘틀린’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조차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여 그들 스스로 정상이 아님을 인지하고 살도록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해도 마냥 좋았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음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도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형, 민수 형, 나는 있잖아, 이런 것들은 하나도 필요가 없어. 나는 이런 것들을 사 주는 민수 형이 필요한 게 아니야. 나는 그냥, 형이 내 곁에, 진정으로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랄 뿐이야.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은 한번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런데 왜 자꾸만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는 거야? 왜 나에게는 절대로 형 자신을 주려고 하지 않는 거야? 왜 자꾸만 나에게 쓸데없는 물건들만 주려고 하는 거야?– 본문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라는 사실. 그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나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더 갖고 싶기에 욕망에 뒤틀려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도 나는 그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면의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과 더러움을 억지로 가려 둔 채 애써 깨끗한 면만 보여 주는 것 중 무엇이 더 더러운것일까. 사실을 숨기고 감추는 위장술이야 말로 진정으로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 모두는 결국 그렇게 살기 위해, 진정으로 더러워지기 위해 이토록이나 애를 쓰며 아득바득 경계선 안으로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본문
모두가 아무일 없는 듯이 오늘도 웃으며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웃음을 관통하여 내부를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타인들처럼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아등바등 하며 나를 가리고 또 다른 페르조나를 등장시켜 사회라는 흐름 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뿐 실상은 그 누구도 평이라는 삶의 기준에 서 있는 사람을 없다.
모두가 옳고 그름을 인지하고 그것이 유전적으로 이미 내 몸에 흐르고 있듯이 나는 언제나 옳고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다는 듯이 자아도취에 빠져 타인에 대해서는 왜 나와 같지 않냐며 비난을 퍼붓기 일쑤이다.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잣대는 진정 곧게 올바르게 서 있는 것일까?
돈을 300만 원씩 쏟아붓고 시간을 2년이나 투자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곧바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는 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 모두 나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이 확고해 보였다. 나에게는 늘, 무언가를 망쳐 버리는 힘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아무 필요도, 쓸모도 없이 인생을 망쳐 버리기만 하는 쓰레기 같은 새끼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 본문
언제나 패배자 일 수 밖에 없는 그를 보면서 과연 이 사회에 승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몇 천 만원을 쏟아 붓고 대학 졸업장을 받아 들고 나서도 전전긍긍해야 하는 이 시대에,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종종거리며 마음을 졸여야만 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그를 보면서도 단지 이성애자가 아니고 평이하지 않은 집안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려는 그를 수식하는 순간, 정크로 전락해버리는 이 씁쓸한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그가 정크라면 한때 정크였거나 지금이 정크가 아닌 사람이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왜 나만 늘 이렇게 거지같이 구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을 구걸하고, 일을 구걸하고, 엄마와 아버지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나는 자꾸만 화가 나는데,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데, 그것은 민수 형이 내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아서, 직장에서 나를 받아 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게 아니라 이토록 구질구질하게 그들에게 매달리고 있는 나 자신 때문에 화가 나는 거였다.
반드시……살고 싶었다. 어떠한 삶도, 죽음보다 못하지 않았다. 죽음이,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거라면, 삶보다, 내가 사는 현실보다 못한 거라면, 죽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 본문
어떻게든 살아남아 남들처럼 살아야만, 우리 사회는 나를 그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마냥 그들의 선 밖으로 밀어내어 존재 차체 인정해 주지 않기에 그 사회에 편승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범한 그들의 노선에 편승하려 고군분투한다.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늘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어야 하는 그가 마지막에 자신을 놓으려는 순간, 삶의 이유를 찾는 모습에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틀 안에 갇혀 그 세상이 옳다고만 주창해온 우리의 이야기를 깨고 나오는 그 모습에서 참으로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고마움 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리를 깨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기나긴 흐름의 시간 속에, 나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다. 언제고 어디서고, 생명이 내 곁에 있었고, 그것을 둘러싼 아버지의 생명 또한 단 한 번도 나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의 존재를 보고 있었고, 듣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던,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머나먼 시간에서부터 나에게 자리해 있던 말. 그러나 단 한번도 들어 보지 않았고, 단 한번도 소리내지 않았던 말. 아빠…..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라는 말을, 나는 꺼내어 놓았다. – 본문
루저들의 이야기, 라는 부제를 보며, 동성애자가 주인공이라는 그 하나에만 초점을 맞춰 이 책을 마주하는 것 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내가 참 부끄러웠다. 과연 진정한 루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되뇌게 하는 이 책을 보며 나는 그간 내가 쌓아왔던 편견의 장벽을 조금 낮추고 내 오만했던 생각들을 내려 놓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