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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대화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읽은 단편집 인 듯 하다. 이 책을 통해 정지아 작가를 처음 만났지만 “어떤 생이든 한 우주만큼의
무게가 있다!” 라는 띠지의 글귀처럼이나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 하나의 이야기 마다 생동감은 물론 어디에선가
들어 봄직한,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금새 빠져서 읽은 듯 하다.
책의
제목인 숲의 대화는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다.
잠에서 깨면 옆자리를 더듬는 것이 아내를 만난 이래 평생 계속된 그의 습관이었다. 수심을 거두지
않은 채 그래도 아내는 죽는 날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언젠가부터 그는 아내가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조바심은 습관이 되었고, 이미 세상 떠난 아내가 그를 두고
떠나기라도 할 듯 애를 태우며 그는 매일 산에 오르는 것이다. . –본문
평생
다른 사람을 품고 사는 것이 힘들까, 아니면 그러한 사람을 바라보고만 살아야 하는 사랑이 힘든 것일까. 사랑을 하고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해 무어라 딱 꼽아 대답하기가 쉽지가 않다.
과연 그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교집합의 공간은 실제 할 수 없었을까
고맙소.
복수가 차서, 그에게로 처음 온 그날처럼 배가 봉긋했던 아내는 안절부절 마지막까지 자신의 손을 놓지 못하는 그에게 그 무정한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썩을 놈.
그 썩을 놈은 여자를 그에게로 보내기
오래 전부터 썩을 놈이었다. 여자는 그에게로 보내면서 놈은 살아서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각오했을
것이다. 제 뜻대로 죽었을 것이지만 죽어서도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썩을 놈은 죽어 아내의 마음 속에
둥지를 틀었고 아내의 마음은 철새인 양 찬바람만 불면 그 둥지를 품었다. –본문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내는 그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녀의 발에 있던 점 하나마저도 가질 수 없기에 물끄러미 바라보고 차가워진 발 위에 살포시 그의 발을 얹고
싶은 마음도 작게 접어두고서는 그저 바라보며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아내는 떠나게
되고 평생을 함께 했지만 가슴으로만 품어야 했던 그는 아내가 떠나 간 그 순간에도 매일을 그리워하며 그녀가 첫 사랑을 그리며 죽어서는 돌아가고자
했던 그 숲으로 문안을 간다.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만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8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빨래를 걷듯 목숨줄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본문
할머니가
되었지만 아직도 소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봄날 오후, 과부 셋의 이야기. 여전히 수선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여고생 때나 지금이나 시간이 흘러도 모이면 수다 떨며 시간 보내기 여념이
없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와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더 밝고 훈훈한 느낌이랄까.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 그녀들의 인생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으로 찬찬히 따라가며 읽었던 작품이다.
마지막까지
읽는 동안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목욕 가는 날이었다.
집에 다니러 올 때마다 나는 무슨 핑계를 내서든 애초 계획보다 앞당겨 돌아갔다. 어머니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다리를 절뚝이며 씽크대에 왼팔을 걸쳐놓고
나 먹일 나물을 데치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것이 나는 죽기만큼 괴로웠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머지않아
잊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번번이 도망치듯 어머니 곁을 떠났다. 내가
도망친다고 세월이 어머니를 비켜가는 것은 아닐 터, 반년 만에 만나면 어머니는 더 늙어 있었고, 그만큼 더 괴로웠으며, 하여 더 빨리 떠날 핑계를 찾았다. . –본문
가장
나의 모습과 근접했기에 아무래도 감정 이입을 해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 주름이 늘어버린 엄마를
보며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느낌은 어느 순간 휘발되어 일상 속에 묻혀 버린다. 언젠가 찾아보았던 엄마의
교복 입은 여고시절의 사진을 떠올리며 엄마에게도 소녀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회상하게 되었다. 그 소녀가
이제 훌쩍 커버린 두 딸의 엄마로서 살고 있다. 딸과 엄마로 만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몇 번이나 나는 엄마와 몇 번의 목욕을 갔었을까. 책을 덮자마자
‘엄마, 우리 목욕 가자!’
라며 뜬금없는 소리에도 빙그레 웃어주는 엄마가 있어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세상에
빛나는 별 만큼이나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 모든 사연을
직접 들으러 다니기 힘든 바쁜 시간 속에서 단 한 권의 책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소설이라곤
하지만 어디선가 숨쉬고 있을 것만 같은 모든 주인공들이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