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서재 -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작년에 한 사이트에서 진행했던 책 읽기 프로젝트를 참여했었다. 일 년간 몇 권을 책을 읽을 것인지에 대해 먼저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 무엇이든 가능하고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신년의 계획이라는 목표의 유혹에 빠져 100권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한동안은 지키려 무던히 애를 쓰다 결국에는 50여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는 것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느냐 보다 얼마나 좋은 책을 읽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양서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일단 기본적으로 양서를 가릴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양서를 구별하는 눈을 갖기 위해 목표한 것이 1000권의 책을 읽는 것이다. 올해 역시 100권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있으니, 달성을 했다는 가정하에 10년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일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달성하는 셈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이제 걸음마를 떼어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지금으로선 어떠한 책을 보던 원통형의 망원경을 가지고 책을 보듯이 그 안에 있는 내용들만을 이해하고 따라가기 바쁘다. 좁은 식견을 가지고 있기에 한 권의 책에서 내가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내가 담을 수 있는 만큼만을 안고 담아간다. 아직은 그 깊이가 얕고 소박하기에 동일한 책을 읽고서도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들만의 내공에 경외심 마저 들게 한다.

 요 며칠 간 그러한 경외심의 대상이 또 한 명 등장했으니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김운하 선생이다. 그 간 만권의 책을 읽어왔다는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라는 부재로 그의 서재로 안내하고 있다.

 만 여권의 책 중에서 고르고 고른 13권의 책들. 하지만 한 권 한 권은 단지 그 책의 소개에서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기반으로 해서 방대한 그물을 던져 지식을 탐하듯이 수 많은 이야기들을 엮어서 다시 그만의 책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자신의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는 폐륜을 저지르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결혼하여 아버지이자 형제자매인 자식들을 낳는 비운의 주인공 이야기. 이 비극적인 이야기 안에서 인생이라는 원반 위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에만 탄식하며 그렇게 흘려 보냈다.

 오이디푸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가운데 치명적인 것은 우리 자신의 객관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자기는 과연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까? 내가 라고 믿는 정체성은 거대한 착각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눈뜬장님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을 모르는 것 아닐까

 오이디푸스를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은 끝에 깨달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내가 나라고 믿는 나는 가짜다. (중략) 그러니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존재 가치는 착각이거나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는 내가 젊은 시절 한때 매혹 당했던 자살에 대해서도 달리 보게 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일종의 타살이다. 낯선 타자를 멋대로 죽이는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내 것도 아닌데 남의 목숨을 함부로 뺏는 건 오만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고 했던 주제의식도 그것이다.

 인간이여, 제발 까불지 말고 오만 떨지 말라!” –본문

 같은 오이디푸스왕를 읽고 저자와 나는 너무도 다른 방향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1차원적인 관점으로 오이디푸스왕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다각적인 면에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고 오이디푸스왕을 통해 라는 존재에 대해 규명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가?’는 인간이라는 누구나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물음 중 하나이다. 존재만으로 스스로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것이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기에 오이디푸스왕을 보며 나를 찾아봐야겠다는 것을 어찌 보면 어디에서나 가질 수 있는 물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라는 존재의 규명에서 그의 의문을 단절시키기 않고 자살이라는 주제까지 확장시킨다. 자살이란 내가 나의 삶을 마감한다는 주체적인 행위라고 주창할 수 있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오롯이 알지 못한 채로 마감하려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그의 주장 앞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나는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며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나는 오이디푸스왕을 읽은 것일까?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고뇌에 빠져 있을 무렵 또 다시 거대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시지프의 신화였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잇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거이야 말로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 자명하기에 아무데로 쓸모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러한 모욕, 삶을 수렁으로 빠뜨리는 이런 부정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 삶에서 벗어나길 요구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치워버리고 우선적으로 밝히고 추구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본문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노여움을 사게 된 시지프는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끝이 있다면 어떻게든 이 형벌을 받고 그 이후를 생각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신들이 준 형벌은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또 다시 바위가 굴러 떨어져 버리기에 시작과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계속해서 바위를 산꼭대기로 이동시켜야만 한다. 끝이 없는 영원의 세계에 바위를 운반해야만 하는 시지프.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여긴 신의 형벌이다.

 카뮈가 말한 반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부조리를 부조리 상태로 살게 하는 것, 무익하고 희망이라곤 없는 노동뿐인 삶을 불굴의 의지로 감내하며, 부조리를 명료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 한마디로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때문에 카뮈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를 명료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영웅과도 같다. 부조리를 버티며 사는 부조리의 영웅이다. –본문

 카뮈가 말한 반항을 말 그 세계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렇기에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뒤집던 혹은 박차고 나오며 그 곳에서의 탈출이 바로 카뮈의 반항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다시 시지프의 형벌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는 그 물리적인 장소에서부터 탈출이 가능한가? 내가 생각했던 반항이라면 그는 신들을 피해서 어떻게든 그 산을 벗어나야만 한다. 굳이 소설 속의 그가 아니더라고 현재의 나만을 보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는 이 책상과 의자 안에 결박시키고 있는 회사라는 시스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내가 생각한대로 이 곳을 박차고 나와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었을까?

 인간-시지프는 이렇게 외치는 거다. “세계는 무의미하다. 우리의 삶은 객관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런 부조리를 느끼고 의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한 삶은 부조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본문

 아무리 낙원에 머물러 있다고 한 들 우리는 금새 그 공간이 시들해져 버릴 것이다. 찬란하게 보이던 그 순간은 어느 새 일상으로 변모해 버리고 그 곳은 또 다시 무의미한 세계가 되어 버리듯이 말이다. 진정 무의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며 한숨만 푹푹 쉬고 탄식하기 보다는, 그 곳에서 나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시지프를 보며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즉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사는 시지프를 보며 신들은 가장 가혹한 형벌을 주었다며 만족했을지 모른다. 나 역시도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의 시지프는 너무도 안타까운 삶을 살아야 하는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부조리의 앞에서 부조리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피하고자 하는 선택인 자살이 아니라 그 부조리를 인식하고 반항할 수 있기에 나는 불쌍한 시지프가 아니라 행복한 시지프를 볼 수 있었다.

 이미 시작부터 너무도 격차가 있는 그와의 조우였기에 그가 보는 세상만큼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만남이 한낱 자괴감에 빠져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 있는 책들이 지금 나의 서재에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며 종종거리게 하고 여기에 있는 책들을 읽어보아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만으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언제 나는 그와 같이 나만의 책들을 가지고 나의 서재를 꾸미게 될까. 한 번에 뛰어 넘지 않고 천천히 다독이며 1000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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