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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말하여질 수 없다 - 미래 인류를 위한 담론, 도덕경
차경남 지음 / 글라이더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노자, 도덕경, 무위자연. 노자,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은 있으나 말 그래도 듣는 것에서 그친 것이 전부이다. 人爲의 반대인 無爲은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는 상태로만 알고 있었으니 글자 그대로의 해석에만 갇혀 있었던 것이다. 노자가 말하던 무언가 이름으로 시작되면 그로써 만물이 생겨난다는有名萬物之母가 아니라 이름 안의 세계에만 빠져 있던 것이다.
억지로 무엇을 꾸미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을 사는 無爲自然, 세상의 모든 만물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道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 노자는 이러한 진리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그대로 깨닫는 것 그것이 그거 말하는 진리이다.
무위자연 안에서는 도가 어느 곳에서나 행해지기 때문에 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는 도가 이미 널리 행해져 있기에 신이 굳이 해야 할 일이 없으므로 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신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주변 지인들을 보면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종교가 또 하나의 주요한 요건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종교이기에 만남이 시작 혹은 지속되기도 하고 종교가 다른 경우 그들의 인연을 정리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자유를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의 기본권으로 정하고는 있으나 이미 종교라는 틀은 우리네 사이에서 그 무엇보다도 튼실한 장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과 우주를 다시(re) 연결시킨다는(legare)에서 어원을 빌려온 종교(religion)이 일부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가 아닌 되려 인간과 인간사이의 단절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혼란의 중심은 종교의 가르침의 원래의 본연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본문
단 5분의 시간이라도 공기가 없으면 이 세상과의 삶의 안녕을 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공기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내가 얻고자 하는 노력이 없어도 당연히 있는 것들이기에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사는데 있어서 불 필요한 것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갖기 위한 불굴의 노력 아닌 노력을 하며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탐욕을 끊이지 않기에 매일을 괴로움 속에 살고 있다. 노자가 현존했다면 그는 우리에게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그 안의 근원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라고 이야기 했을 것이다. 방 안에 어떠한 가구, 어떠한 인테리어 등이 있어서 그 공간이 방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이라는 공간 자체만으로 그것은 방이 되듯이 사람의 마음 속에 노자가 말하는 道가 없다면 우리는 허둥지둥하며 본래의 것들을 놓치고 살게 될 것이다.
약 5000자, 81장안에 노자의 진리가 도덕경이란 책 안에 담겨 있다. 글자 수로 보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의 무게는 그 어떠한 것과 견줄 수 없을 만큼 깊고 방대하다. 원문을 그대로 보고자 한다면 약 1~2시간 내에 다 읽어 버렸을 테지만, 여전히 도덕경은 도덕경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가 깨달은 진리를 수 많은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대신 오롯이 그 안에 담아내려 했기에 오늘날 저자를 통해 노자가 말하려던 세계를 배울 수 있었다. 분명 쉽지 않은 내용들이고 한 번 읽어서는 모든 것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책 장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 읽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