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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1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시간,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왜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이 내용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남편 레너드 울프의 이야기 그만큼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가 한창이었던 그 시절의 나에게 이들의 플라토닉 사랑은 마침내 내가 찾아오던 가장 완벽한 형태의 갈망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릴 적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의붓 오빠로부터 상습적인 성추행을 당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녀는 평생 남성기피 혹은 혐오증에 빠지게 된다.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며 살던 그녀에게 그녀를 여자로서, 아내로서 평생 지켜주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레너드 울프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요구했던 두 가지, 부부로서 함께 살되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공무원생활을 하던 레너드에게 그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요구들을 레너드는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묵묵히 그녀만을 위한 삶의 동반자로 곁에 지켜주었다. 그녀가 작가로서 제 2의 인생에 펼칠 수 있도록 출판사를 열어 그녀를 독려했던 레너드. 그녀가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그 하나만을 오롯이 담고 떠난 그들의 이야기는 이 출항이라는 소설 속에서 다시금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처녀작인 ‘출항’은 10여년간 열두 번을 고쳐 쓰며 34살에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녀 스스로가 의도한 대로 내가 그 길을 따라 온 것인지 아니면 나만의 해석에 빠져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 속의 레이첼을 통해 버지니아의 인생을 담아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린 어머니와 그녀을 어머니의 대역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틈에서 레이첼은 20대의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느낌이었다. 다분히 조용하고 참한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남자들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세상은 그녀의 바람대로 녹록히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여자에게 규정되어 있는 틀을 벗어나는 것을 꺼려했던 그 당시 남자들에게 이블린 머거트로이드와 같은 인물은 그 시대에는 꽤나 모험적이고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모습들은 남자들을 위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에 별 다른 문제가 발생 하지 않도록 집안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알아도 모르고 지내는 허깨비와 같은 그저 여장을 한 인간을 원했을 터이다. 이러한 시대에 레이첼이 리처드의 기습 키스에 대항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혼자만의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제 힘으로 자신을 일으키는 것뿐이다.
버지니아 울프 그녀 자체에 관심이 있었기에 그녀의 첫 작품인 출항은 내게 더 아련하게 남는 듯 하다. 어쩌면 수잔처럼 소설에서 만큼은 그녀의 삶이 평탄하고 소소한 행복이 흐르길 내심 바랐을지도 모를 터이다.
기쁨의 여신인 유프라지니호를 타고 시작된 그녀의 항해는 그녀 스스로도 멈출 수 없는 인생의 시작이다. 행복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그녀에게 들이 닥친 현실이라는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너무나도 버지니아 울프를 닮아 있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