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련화
손승휘 지음 / 황금책방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유관순 누나. 일제 강점기에 만세운동을 부르다 투옥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녀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스스름 없이 내던졌다. 어릴 적 읽은 위인전이나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 중 내가 그녀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그녀의 이름을 이 소설 안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유관순이 아닌 소녀 유관순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제고 나의 조국에 대해 이토록 열렬한 애국심을 나타낸 적이 있었던가? 란 물음이 문득 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취득한 대한민국 국적, 태극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고 나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대해 애착에 관해서 뚜렷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듯 하다. 응당 가지고 있기에 공기 마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그들이 이 공기를 얻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 놓아 다시금 되찾은 이 소중한 것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던 내 자신에 대한 회한으로 한창을 울고 나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하하하.” 일본군 장교는 호쾌하게 웃었다.

이게 너희 조센징들이다. 우르르 몰려들어 들끓었다가 조금만 수가 틀려도 꽁무니를 빼버리는, 이게 너희들 조센징이란 말이야.” –본문

 타국을 침략하여 국권을 빼앗은 자들이 이 나라에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 이 세 글자는 그저 웃음이 아니었다. 논밭을 뺏고 우리의 식량과 가족과 나라를 빼앗은 그들의 웃음은 점점 치밀하고 잔인하게 우리를 옥죄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자신들의 소임인 냥 계속 할 뿐이었다. 그 웃음 소리의 활자가 살아나 귓가를 맴도는 듯한 환청에 소름이 돋게 하였으며 그들을 향해 무어라 말도 못하고 책 안에 갇혀 있는 내가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그녀가 옥중에서 숨을 거둔 것이 18살의 일이니 태어나면서부터 그녀는 일제 강점기의 시절에서만 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있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엔 그녀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벌레처럼 기어 다녀야만 하는 오빠를 보고 아버지의 눈물과 어머니의 끝없는 노동. 이웃 동네 언니의 한 맺힌 외침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씩 곱씹어 보게 된다. 나라를 잃었다는 의미를 그녀는 사람들의 눈물과 아픔으로 배운 것이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조선이 너무 싫었다. 약하고 한심한 이 나라에 태어난 내가 싫었다.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돈을 끌어다가 학교를 세우고 국채보상운동을 하느라 집안을 가난에 빠뜨렸다. 가난은 가장 치명적인 인생의 적이라는 걸, 어릴 적에 나는 이미 배워버렸다. 오빠는 무능력한 조선이 싫어서 방황하고 다닌다. 이 모든 것이 다 조선이 힘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 

 소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평범함 일상 속에 도란도란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아침에 눈 뜨며 자신의 진로를 꿈꾸고 또 어떠한 사람을 만나 자신이 가정을 꾸리게 될지 그런 소박한 꿈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익현과 함께 떡 방앗간을 차리고 아이들의 낳아 기르는 폄범한 조선의 아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나라를 빼앗긴 그 한탄의 세월 속에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 그녀에게는 내가 누렸던 그 평범한 일상은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일이었다.

우리가 독립을 선언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일본 사람들이 우리 주장을 듣고 순순히 물러날까요?”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설사 우리말을 순순히 듣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 민족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일본일들을 몰아내는 데 힘을 모을 테고요.”

만세운동은 독립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본문

 그녀라고 두려움이 없진 않았을 게다. 나의 나라에서 이 땅이 우리의 것임을 외치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어간 그 수 많은 이름 모를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그 두려움보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더 부풀어 올랐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 흘리며 싸우고 저항하는 것들이 가엽고 아프기에 그녀는 쓰러져 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앞으로 나선 것뿐 이었다.

 매질과 고문과 참을 수 없는 형벌 끝에 눈물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결정하여 온 이 길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 고통의 순간 순간을 그녀를 따라 가면서 책의 끝 자락에 다다를수록 그녀가 살수만 있기를, 살아서 그들의 적으로 굳건히 남아 주길 바랐다. 이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가혹했다. 끝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보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어떠한 형태로나마 살아있어 주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고 있었다.

 내가 진짜 죄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 때문에 목숨을 잃으셨다.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는 말할 것도 없고 동생들에게도 죄인이고 오빠에게도 나는, 죄인이다.

 하지만 난 너희들에게는 죄인이 아니야. 난 너희들에게 잘못한 게 없어. 그저 힘이 없어서 얻어맞고 갇혔던 것뿐이지 죄를 지어서 그 죄의 값을 받는 건 아니야. –본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관순, 그녀는 그렇게 우리를 통해 못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18살이라는 짧은 생에 동안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그녀의 나라에 살지 못했지만 나는 그 곳에 살고 있다. 그녀가 아니었어도 이 나라에 독립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못 다 핀 인생을 담아 이 나라에서 한련화가 영원히 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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