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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 전세계가 주목한 코넬대학교의 "인류 유산 프로젝트"
칼 필레머 지음, 박여진 옮김 / 토네이도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대략 80년의 시간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면 나는 그 중 1/3의 시간을 넘게 걸어왔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나의 의지대로 오기 보다는 이미 그려져 있는 길을 따라 걸어온 것들이 태반이며 그나마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길목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다. 아직 가보지 않았던 길이기에 두려웠고 그래서 때론 타로나 점괘에 따라 혹은 타인의 말에 그 선택을 미루기도 했었다. 현재의 결과가 실패로 다다르더라 하더라도 나는 나의 실패가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현황으로 책임을 전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노인, 그들을 나이 가 든 늙은 사람으로 칭하기엔 그들이 담고 있는 힘을 너무 경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지내온, 견뎌온 세월 속에 고스란히 축척 된 시간의 탑과 지혜를 찬미하기에 저자는 그들은 ‘현자’라 부른다.
노인들은 다른 연령대 사람들에게는 없는 지혜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았고 젊은 사람들은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첨단기기 작동법을 누구보다 빨리 습득하거나 은행 창구를 이용하는 것보다 자동인출기를 더 편안하게 여기거나 최신 예능 프로그램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경험만큼은 어마어마하다. 기나긴 인생의 대부분을 산 그들은 삶에 있어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정확히 판단한다. –본문
사실 나는 내가 할머니가 될 거이란 그 자명한 진리가 아직까지 와 닿지 않는다. 10대의 그 급박했던 시간을 흘러 30대의 문턱으로 오는 동안, 서른 살이란 숫자가 내 인생에 드리울 것도 버거웠던 만큼 노년의 나는 아직 내겐 미지의 세계이고 오지 않은 것만 같은 내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인간에게 가장 낯설고 두려운 경험. 그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으로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피해가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머리가 히끗하게 변하고 얼굴에는 윤기보다는 검버섯과 주름이 가득한. 그 때의 나를 상상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나에게 이미 그 곳에 당도해 있는 그들은 이야기한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고 상상했던 것 보다는 더 즐겁고 행복하다고. 그러니 미리 걱정하지 말고 지금의 나를 위해 펼쳐진 시간을 즐기라고 말이다.
80대에 접어든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나이 들고 노쇠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무덤이나 영안실로 가는 중이라고도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그보다는 훨씬 괜찮으니까. 아직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세상에는 많아. 관심을 가질 만한 일들, 기쁨을 안겨다 줄 일들이. 우리는 지금 길의 끝에 서 있는 게 아니야.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있는 거지. –본문
1000여명이 넘는 노인들을 통해 얻어낸 8만년이란 삶 속에서의 지혜, 3만년의 결혼 생활이 나에게 아낌없는 삶 속 요추를 진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 안에서 지금 나에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인 결혼에 대한 문제는 너무나도 깊은 울림으로 전달되었다.
내가 가족과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 나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만나 결혼이란 관문을 통과하려 한다. 그 누가 떠밀거나 강요하진 않지만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나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때가 왔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다. 서른이란 숫자가 주는 자명종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울리는 시계의 초침이 요동치고 있음에 현재의 나는 두려우면서도 지금의 나의 시간에 집중해야만 한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의 반려자가 될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나면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고 한다. ‘그냥 알 수 있어. 그 순간이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알 게 되고 이해 됐던 일처럼 만약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 게 된다는 확신만 있다면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경험자들이 말하는 그 순간 내 귓가에 종소리라도 울려 퍼지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재연될 수만 있다면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 누가 나에게 당신의 반려자는 누구 입니다 라고 알려줄 수 있겠는가. 현자인 그들은 나에게 객관식 마냥 답을 알려주기 보다는 그 곳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낭만과 사랑은 다른 거야. 경험이 가르쳐주지. 내가 봐온 바로는 낭만적인 사랑만으로는 결혼생활을 제대로 하기에 부족해.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아. 사랑은 결혼생활을 통해서 서서히 자라나고 평생을 거쳐 계속 커지는 것이지. 처음 사랑이 육체적으로 끌리는 감정이었다면 그 다음 사랑은 비슷한 관심사나 활동을 함께 하면서 찾는 즐거움이야. –본문
그들은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부부, 부모로서의 몇 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그 동안의 자신들이 만들어온 발자취 중 가장 필요한 것들은 스스럼없이 내어주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겪어 왔기에 초연하고 담백하게 그들의 삶의 한 조각을 나눠 주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이렇듯 여유롭지 많은 않았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넘기 힘든 오늘이었을 것이고 내일의 그림자가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 왔기에 그 터널은 어둡고 막막한 것이 아닌 진주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한 권의 책으로 나는 몇 만년이란 시간 속의 양분을 양껏 흡수한 기분이다. 그들이 평생토록 일궈온 인생의 밭에서 나는 아름드리 자란 과실을 얻어왔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너무도 쉽게 이 가르침을 얻은 것이리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제 나도 알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