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 원시의 자유를 찾아 떠난 7년간의 기록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경의 결과다. 처음엔 희미했지만 여행을 하면서 점차 뚜렷하게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다. 야생성을 찾아 떠난 이 여행에서 내가 구한 것은 깔끔한 사진첩에 끼워질 멋진 사진 속의 장관이 아니었다. 예술이나 섹스, 사랑 그리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야생성에도 그속에서 일관되게 고조되는 울림이 있다. 나는 바로 그 속성을 찾고 있었다. 야생성을 마셔버린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야생성에 취해 있었고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아예 흠뻑 취해버렸다. 
나는 야생의 의지를 찾아 나섰다. 그 의지가 야성적인 아름다움 속에, 자연력의 생기 속에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고 싶었다. 야생성은 생명에 대해 단호하다. 포획되어 갇힌 야생성은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순수한 자유나 순수한 열정, 순수한 갈망처럼 근원적이다. 야생성은 그 자신의 선언문이다. p.12

   야생성에 대한 강한 갈망과 동경에 이끌려 탄생하게 된 이 책은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따라 떠난 7년간의 여정을 풀어낸, 매우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사실적 묘사와 고찰이 담겨 있다. 책 속에 담긴 광활한 자연과 그 속의 날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생명의 활기는 문명이라는 감옥에 갇혀 진정한 야생성이라고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나조차도 그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나는 송라인(songline, 땅의 경계표지와 길을 찾아가는 미묘한 기준을 제시하는, 구절이 연속되는 형태의 구전 노래), 즉 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음악의 형태로 마음속에 땅을 간직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p.15,16

   저자는 이 ‘송라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인간의 정신, 마음의 능력을 평화롭고 풍요롭게 사용하는 아주 멋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만이 가진 아주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자극과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음악과 언어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제한적이 되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 그 자체와 교감하고 하나가 되는 자유가 아닌 인위적인 조건 안에서 대가를 지불(혹은 무단으로 사용)하고 누리는 흥겨움이나 감정의 고조는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원래의 고전적인 의미에서 자연과 문화는 정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문화는 어느 쪽인가 하면 자연의 숭배였다. p.75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소산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고대 그리스보다 수세대 전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개념을 생태민주주의적 지혜로 확장시켰다. p.116

   사실 우리가 문화적이라고 하는 것의 이면에는 얼마나 무질서하고 혼잡한 것들이 많은가. 도시의 풍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지지만 조금 높은 곳에서 들여다보거나 건물과 건물 사이, 혹은 뒷면을 찾아보면 온갖 오물들과 정리되지 않은 전선들,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문명, 문화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면이 다분하다. 그에 비해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 흐름을 읽고 있는 그대로 예술과 사회구조에 표현해내려고 했던 그들의 흔적은 어쩌면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문화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과 접촉이 있기 전까지 모든 것이 좋았고, 강하게 살았고, 있는 그대로 풍요로웠던(p.132)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기독교가 그들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끌고 들어온 자본과 기업의 계략으로 인해 돈에 대한 인식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곧 그들의 자유로웠던 삶의 방식이 화폐경제에 의존하게 되는 감옥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서구사회는 그들의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이 본래 지니고 누려야 할 열정과 자유의 ‘야생성’을 점점 야만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갔고 문명과 반대되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정착시켰다. 이 책은 이처럼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참다운 야생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야생적인 것은 살 수도 팔 수도 없고, 빌리거나 복제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명백하고 잊을 수 없으며 수치를 모른다. 땅과 얼음, 물, 불, 공기처럼 근원적이고 어떠한 성분으로도 분해되지 않는 순수한 정신, 바로 제 5원소다. 당신의 야생성을 낭비하지 말라. 그것은 귀중하고 필수적이다. 야생성 속에 진실이 있다. 야생성은 듣는 순간 즉시 인식할 수 있는, 녹색의 금으로 불리는 전 우주의 송라인이다. (중략) 야생성은 끝없이 생명을 갈구한다. (중략) 인류의 지고한 목적은 세계의 모든 언어 안에 흐르는 리듬에 유창해짐으로써, 대지를 더 생생하게 만들고 그것을 노래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생명 깊숙이 자리한 영혼이 이 야생 세계의 송라인에 그 진정한 야생성의 잊을 수없는 표시를 남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p.159,160

   우리가 오늘날 혼란스럽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증오가 넘치고 악의와 위선, 계략이 판치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야생성을 강제로 억누르고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단 한 번 성공적이었을 뿐인지도 모를 인위적인 사회시스템을 확장하려는 힘에 자연스럽게 저항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범죄자들을 좁은 감옥에 가두는 대신 야생의 자연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다스려지고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회복하게 하는 시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례를 보면서 야생성을 낭비하지 말고 그것을 되찾아 진실을 품으라는 저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누이트 족의 언어 중에 가장 발달된 것은 눈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오만한 서구의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의 발길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런 이런 표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전통과 새로운 문물 어디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술과 약에 중독되거나 황폐한 인생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점점 포기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아마존의 삼림 파괴 문제나 그에 따른 지구온난화 때문에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있는 현실이 그 증거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해당 지역 원주민들의 문화와 인간적인 삶의 조건까지도 모두 부정하고 황폐화시키는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사람들이 땅의 지형이 어떠한지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를 모를 때, 그 땅은 두려운 황무지가 될 수 있다. p.211

   인간은 지구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지구에 파묻힌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어쩌다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앎에 대한 목적은 잃어버린 채 수단에 점점 목매어가고 있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이 인류를 이런 광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타인의 삶과 다양한 종의 생명을 침해하고 심지어 멸종에 이르게까지 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원주민들의 눈에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인간들의 눈에는 황무지로 보이게 하는 정신상태, 혹은 그 무지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거짓말투성이에다 독선과 교만으로 가득 찬 서구 문화의 대표적 선수들인 선교사들이나 탐험가, 예술가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오늘날 그래도 이 책의 저자처럼 지구와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의미를 회복하려 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이 늘어나고 있고 힘을 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성이 지닌 놀라운 즐거움과 쾌락, 행복이 오늘날의 무질서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탐욕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고, 언제 어디에 있어도 자유와 평화로움을 주체적으로 누릴 수 있고 내가 속한 우주와 내게 주어진 인생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아 매우 유익하고 기쁜 독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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