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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연약한 개인이 특정한 약물에 의지해 자신이 처한 한계를 극복하려 하거나 도피하려 하는 행위, 또한 예술가의 경우 영감을 얻거나 감각의 확장을 통해 예술의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시도로 약물을 복용하는 일은 익히 들어온 이야기들이다. 얼마전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을 통해 비틀즈의 노래제목이 이 약물을 가리킨다고 해서 유명하기도 한 ‘LSD'라는 물질에 대해 다룬 다큐를 보면서 인간이 마약과 같은 약물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체험하는 일과 그 체험을 통해 어떤 성취를 이루려 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심지어 성서의 내용을 다룬 다큐에서는 요한계시록의 경우 저자인 요한이 어떠한 향이나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본 환상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있기도 하다. 계단 하나 정도의 높이에서 살짝 뛰어내릴 때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1초 내외일 것이다. 그러나 약물을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살짝 뛰어내리는 시간이 짧게는 몇 분에서 수십 분까지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아마 쾌락과 관련한 행위와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왜 약물에 쉽게 빠져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쾌락의 절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니 약물을 통해 그 감각이 오래 지속된 경험을 한 사람은 다시 경험하고 싶게 될 것이고 이어서 중독의 상태로 빠지기가 쉬울 것이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소설이라고는 하나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고 얼핏 이것이 소설인지 보고서인지 명확히 정의하기가 힘든 특징을 보인다. 질병의 고통 때문에 처음 아편을 시작했던 주인공은 아편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 확장되고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철학의 경지가 한층 깊고 넓어지며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지적 욕구의 추구에 있어 아편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러나 이내 작가는 아편이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괴로운 꿈과 환상에 시달리면서 아편을 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며, 모든 계층의 ‘아편쟁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상상력과 같이 한계와 끝이 없는 신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처럼 좋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몸을 망가뜨리고 이어 마음을 불안과 우울에 빠지게 한다. 결국 몸과 마음의 불균형은 삶 자체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나 일반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과정이다. 순수하게 자기 통제를 해가며 자신의 의지와 약물의 조화를 죽을 때까지 잘 이룬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자신이 아편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한 시점에서조차 그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고통의 과정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드 퀸시의 글에 대한 평가는 이 책의 해설 부분의 인용문이 적절한 것 같다.
‘간절함’과 ‘지지부진’, ‘정확’과 ‘혼란’, ‘합리’와 ‘미궁’ - 서로 모순되는 이런 특징들이 이루고 있는 미묘한 균형, 바로 여기에 드 퀸시의 산문이 지니고 있는 유례없이 매력적인 생명이 있다.(중략) “덧없이 사라지는 그때그때의 영감에 수반되는 다양한 결점, 잘못, 경우에 따라서는 장점을 내포하는 거의 ‘즉흥적’이라 해도 좋은 행위”라고 그가 부른 것이다. (p.197-해설부분)
이러한 그의 산문의 특징은 원래의 재능에 아편의 효과가 더해져 극대화된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한 법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성취를 이룰 때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한 것이어야만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적을 이룬 장본인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의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 문학사에서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해설 속 인용문을 여기 하나 더 옮기고자 한다.
“드 퀸시는 문인과 저널리스트의 잡종이다. 드 퀸시의 글은 낭만주의 문화의 미학적 추상화일 뿐만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연속적인 주석이다. 낭만주의의 유기적 전체 내부에서 그는 가장 양면가치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낭만주의의 특유한 표현을 영구히 전하는 동시에 파괴하고, 19세기 문화의 더 큰 정신적 외상의 증후로서 아편 중독을 고백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드 퀸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p.203-해설부분)
이 평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문화의 정신적 외상의 증후로서의 아편 중독’이라는 부분인데 오늘날에는 이것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중독되게 하는 문화의, 문명의 패악은 무엇일까? 2차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할 돈과 같은 주객이 전도된 물질개념들이 아닐까?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고백과 거듭남이 필요한 때이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결코 쉽지 않았을 개인의 고백이라는 차원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죽비소리 같은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