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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시작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7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너무나 많은 시작’이란 소설의 제목을 보고 이처럼 인생의 특징을 적절히 표현한 문구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작과 끝을 겪고 있는가. 하나하나 미처 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밀려오는 새로운 시작과 끝 때문에 자칫하면 인생 자체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을 지경이다. 거리를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이외의 느낌이 들지 않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사정을 알게 된다면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들이 없을 만큼 다양한 인생이야기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듣다 보면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지나온 사소하고 구차한 이야기들이 모여 지금 한 사람의 존재를 형성하고 지켜온 것이기에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평균 정도 되는 주인공의 인생을 시시콜콜하면서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다. 물론 주인공은 태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부모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고 성인이 된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키워준 어머니와 갈등까지 겪는, 어찌 보면 평범하다 할 수 없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쉽게 밝힐 수 없는 사연 하나쯤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주인공 데이비드는 어렸을 때부터 삶이나 역사의 흔적을 남기는 물건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출생의 비밀로부터 비롯된 본능적인 애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만나게 될 그의 어머니에게 들려주기 위해 그의 삶의 흔적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이야기를 채워가는 그의 모습은 인간에게 있어 개인사를 기록하고 증명해줄 물품을 수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인 것 같다. 존재의 기초를 다지는 행위로써 현실의 흔들리는 삶을 바로잡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까.
작품 속에는 주인공 데이비드뿐만이 아니라 키워준 어머니인 도로시와 그의 취향을 유일하게 인정하고 개발해준 어머니의 친구 줄리아, 아내 엘리너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깊은 애정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가하면 반대로 갈등하고 다투며 상처를 주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 온전히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성숙의 단계로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많은 시작’은 작가의 데뷔작인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함께 읽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단편집 ‘녹턴’을 읽었는데 존 맥그리거의 작품도 비슷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19~20세기 영국사를 관통하는 가운데 평범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럽게 독자를 소설로 잡아끄는 매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