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 거둔 가장 큰 수확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일본계 영국 작가로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미 세계적으로는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남아 있는 나날’의 가장 큰 장점은 시대 배경이 20세기 초중반의 영국이고,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낯선 전통이 있는 영국의 ‘집사’라는 직업과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의 있었음직한 일들을 다루고 있어 굉장히 딱딱할 것 같지만 의외로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게 말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고 있어 작가의 다른 소설은 어떨지 궁금하게 한다. 

   소설은 주인공 스티븐스가 전 인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달링턴 경을 섬기던 시절에 있었던 일을 1956년 현재의 시점에서 여행을 하면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평생을 섬긴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충성심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집사로서의 자부심을 높게 가지고 있던 스티븐스는 현재 섬기고 있는 미국인 페러데이라는 사람의 배려와 그 자신의 업무에 대한 실수를 만회하면서 동시에 예전에 미묘한 감정을 가졌던 켄턴 양과의 재회를 위해 여행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마음속에 묻어 두고만 있었던 지난 날들에 있던 다양한 사건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프로페셔널한 집사로서의 삶에 있어서는 만족을 하지만 주체적인 한 개인으로서는 상실과 허무함의 쓰디쓴 감정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당사자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던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가졌던 스티븐스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과 의미를 되새기면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소설 속에 묘사된 결국 이루어질 수 없었던 스티븐스와 켄턴 양과의 고집스런 대화 공방전을 보고 있자니 오늘날의 어떤 남녀 간의 심리를 다룬 연애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또한 당시의 높은 신분의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을 대접하는 장면들이 많다 보니 역사의 이면, 즉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했던 시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탐욕이 순수성을 본격적으로 넘어서는 시대의 전환기를 소설 속에서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의 시선으로 간접적이긴 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이며, 결국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어떤 체계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임을 보여주고 있어 씁쓸한 면도 있지만 늦게나마 주인공이 조금은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되찾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 소설은 의미를 생각하고 해석하는 즐거움도 분명 클 테지만,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로서 무척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책 말미에 수록된 이 작품과 한나 아렌트가 만나는 지점을 다룬 번역가 김남주 님의 작품 해설도 소설의 이해를 돕고 있어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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