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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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 세계는 각 사람들의 불확실한 꿈과 꿈이 연결되어 있는 토대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더 이상 꿈을 꾸기를 거부하거나 작은 실수로 조금만 그 균형이 흐트러져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무서운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름의 마지막 장미꽃 한 잎은 너무나 강렬했다. ‘도미노’,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와 같은 종류의 소설을 읽으면서 비교적 나와는 취향이 맞지 않아 한동안 멀리 떨어져 있던 온다 리쿠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데 눈 깜짝할 시간조차 길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온다 리쿠의 소설을 다시 펼치면 될 일이었지만 그 즈음하여 다른 흥미로운 작가들의 대거 등장으로 인해 소원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거짓을 사실처럼 잘 꾸며 내려면 사실을 어느 정도 적절하게 섞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색깔을 입히는 쪽이 얘기하기가 쉽다. (중략) 그녀들은 과연 무엇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나는 그 점에 흥미를 느낀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거짓말을 해 왔다” (p.48)
“진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허구가 섞이면 더욱 진한 향을 풍긴다” (p.244)

   사와타리 가문이 세운 깊은 산 속의 궁전 같은 호텔 속에서 펼쳐지는 실제와 환상이 뒤섞인 미스터리한 이야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 동안 모두가 서로 다른 꿈을 꾼 것처럼, 공간은 하나이지만 각 등장인물들의 불확실한 기억이라는 창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남매 사쿠라코와 도키미쓰 간의 안타까운 관계와 그 둘을 애틋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는 사쿠라코의 남편 류스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던 사쿠라코의 또 다른 연인이자 사와타리 가문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는 다쓰요시, 작품 속을 관통하는 큰 갈등의 뿌리를 뽑고자 하는, 역시 이 가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아마치 교수, 그리고 배우이자 류스케와 친척 간인 미즈호와 그녀의 매니저 사키 등 각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어느 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느 것이 뒤틀린 기억과 망상에 의한 부산물일 뿐인지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있었다고 믿으면, 공언해 버리면, 사실로 인정된다. 그런 일이 세상에는 왕왕 있다” (p.75)
“허상을 구축하는 사람들. 그 세 자매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하루하루 자신의 허상을 만들어 간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상, 남들이 이걸 자신이라고 여겨 줬으면 하는 상을” (p.123)

   이 모든 인물들의 중심에 매년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의 주인공이자 사와타리 가문의 어른들인 세 자매 이치코, 니카코, 미즈코가 있다. 류스케에게는 이모들이며, 니카코는 미즈호의 어머니다.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는 세 자매의 대화를 청중들이 보는 형태로 이 수수께끼의 파티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세 자매의 대화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의 전개로 사람들을 두렵게도 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여인의 죽음과 함께 그해의 파티는 의문을 남긴 채 끝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등장인물들은 자기 안에 있는 분노와 슬픔,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문제는 훗날 이들이 떠올리게 되는 그날의 사건들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 누구의 기억이 진실이며, 누구의 기억이 환상인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지난해 이곳에서 사건 따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어요. 있는 것은 지난해를 사건화하려는 당신들의 의지뿐이죠. 없었던 밀회를 있었던 것으로 하고 낯선 남자와 여행길에 오르려는 주인공이 있어요. 하나, 그런 여행이 성공할 리 없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느긋하게 쉰 후에는 자신이 아는 세계로 돌아와야 할 겁니다” (p.371)

   작중 아다치 교수가 보는 환영처럼 이 소설은 모래에 묻혀 모래시계의 사구 아래로 가라앉듯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무엇을 위해 그토록 냉철해야 했으며, 강인한 척 해야 했는지를 묻게 한다. 비극적인 현실을 뒤로 한 채, 믿고 싶은 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는 등장인물들의 환상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 이 삶이 제발 꿈이기를,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나의 모습을 비춰보기도 했다.
   온다 리쿠의 소설 세계는 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설정과 이미지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빠지는 것은 조심해야겠다. 그녀의 소설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고 위로를 얻는 선물 같은 것이니까. 다시 삶으로, 내가 아는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힘겹게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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