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로 가니 -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 소리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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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제강점기였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와 그 흐름을 읽어냈는지 못 읽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지도자들의 무능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이어령 선생님이 태어나신 날은 1933년이다. 그러니까 일제강점이 극에 달한 시기에서 일본이 원폭을 맞고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가 이어령 선생님에게는 곧 유년기였던 것이다. 이 책은 이어령 선생님의 유년 시절에서 특히 교육, 한문, 문자 등을 키워드로 하는 식민지 시기 교실 풍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울림이 큰 말은 바로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는 표현이다. 특히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언어 교육 정책이었다. 일본어가 곧 우리 민족의 국어가 되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아이들은 그것이 무슨 속뜻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일본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도록 한 강요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실수로 우리말을 한 마디라도 하게 되면 미리 나눠준 표 같은 것을 한 장씩 뺏어올 수 있는 놀이 혹은 보상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아이들은 그것을 하나라도 더 받아 이득을 보려고 정서적으로 심약한 아이 옆에 붙어 이놈이 한국말을 쓰나 안 쓰나 감시하는 행위를 죄의식도 없이 해댔다. 심지어 집에까지 쫓아가 귀를 기울였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언어가 생각의 집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떤 언어가 입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어떤 문화에 속해 있는지, 또 어떤 지식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습득했는지도 중요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인 아시아, 그중에서도 종주국인 중국와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서 같은 한자가 어떤 식으로 변용되어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각국의 문화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특히 이렇게 갈라진 의미를 한 데 모으면 그것이 바로 온전한 하나의 정론으로 형성된다는 것에서 이어령 선생님의 탁월한 통찰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공부’가 중국에서는 여가를, 한국에서는 배우고 익힘을, 일본에서는 생각한다는 의미를 각각 지닌다고 하는데, 이것들을 합칠 때 훌륭한 교육론이 된다는 통찰이다. 즉 “시간 여유가 있어야 공부할 수 있고, 공부를 해야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의미 있는 교육론이 도출되는 식이다.

인류의 역사를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대립과 경쟁으로 풀이해낸 부분도 눈길을 끌었다. 중국을 예로 들어 동방계 농경집단인 은나라의 ‘조개 패’자와 서방계 유목집단인 주나라의 ‘양 양’자가 각각 구축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이 두 가지 거대한 문화가 중국 문화의 기본적 틀로 만들어진 셈이라는 분석은 감탄을 자아냈다. 이것은 한자를 풀이하면서 나온 통찰이기는 하지만, 서구 문명에서도 같은 맥락의 분석틀로 접근하면 충분히 통할 수 있는 문명 해석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기는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자리 잡아가는 데 필수인 정신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이런 시기를 혹독한 일제강점기 아래에 보낸 이어령 선생님이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해석해내는 선봉장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떤 한 정신이나 문화, 사상에 물들지 않고 포괄적으로 흡수하여 지성으로 승화시킨 이어령 선생님의 삶은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꼭 갖추어야 할 역량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사고의 유연을 이끌어줄 기폭제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네이버 「리뷰어스 클럽」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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