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백 리 퇴계길을 걷다 - 지리학자, 미술사학자와 함께
이기봉.이태호 지음 / 덕주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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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 길위에 있는 사람의 내면과 그 실속을 보여준다. 너무나 분주한 삶이거나 생각 없이 본능이나 이기심만으로 사는 사람에게 길은 아무런 즐거움도, 감동도, 교훈도 주지 않는다. 자신만을 중심에 두는 마음에겐 길도 자기의 마음을 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생명의 신비가 깃든 꽃 한 송이나 풀 한 포기가 그저 잡초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생명을 존중하고 나 아닌 것에 대한 배려심을 지닌 사람에게 모든 외부의 존재는 감탄의 대상이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겸손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속 깊은 평범한 사람의 눈에도 길은 세상 만물의 이치와 진리를 가르쳐주는 스승이 될진대, 퇴계 이황 선생 같은 역사적 위인에게 있어 오랜 여정을 채워주었던 길은 어떤 풍경과 의미로 다가왔을까? 당사자에게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 길을 따라가보면서 적어도 그 심정이나 기분을 유추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경복궁을 시작으로 남양주 미음나루, 운길산, 양평 한여울, 원주, 충주 가흥창, 단양, 소백산, 영주, 안동 도산서원에 이르는 육백 리 길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거리 측정법으로 환산하면 240Km나 되는 코스다. 퇴계 선생 본인에게는 그런 인식이 있었을 리 없었겠지만, 후대의 우리들에게 선생이 지나온 길은 하나의 역사적 이정표가 된다. 이 길은 약 10일 간의 여정으로, 저자들은 그 시간의 흐름에 맞춰 퇴계길을 재구성한다.

이 책은 길을 지나오면서 그 길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현대사의 이야기를 고루 배치하여, 역사가 단선적이 아니라 연결되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흐름은 인식하기에 따라 단절되고 따로 독립된 사건처럼 느껴지게도 한다. 그 느낌은 책에 삽입된 사진과 그림 자료에서도 느껴진다. 사진이 현재의 느낌을 담아낸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그린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의 그림은 현재를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들이 가는 길엔 역사의 다양한 흐름이 물결친다. 순교자의 유적은 직접적이고 강렬한 흔적으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목원에서 흘러나오는 녹음의 짙은 향내와 저 멀리 보이는 능선의 아름다움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도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에 대한 접근에 있어 새로운 관점과 방법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특히 길 위에서 펼쳐지는 관찰과 사유, 기록은 과거와 현재가 단순히 이어지거나 혹은 인과관계나 선후관계뿐만 아니라 하나의 시간선 위에서 중첩된 형태로 켜켜이 쌓이는 것도 역사가 이루어지는 한 형태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삶에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와 우리가 있고, 미래에 만날 나와 우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네이버 「리뷰어스 클럽」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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