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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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라고 하면 먼저 흑과 백의 대립과 조화가 떠오른다. 먹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다른 색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수묵화에 대한 첫 인상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게도 흑과 백 사이에 존재 가능한 농도의 변화를 통해 무수한 색의 감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수묵화의 매력이라는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묵화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는 부분이나 수묵화를 그리는 동작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특별한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데도 읽는 사람에게 특별한 몰입감을 일으키는 것 같다.

반복되는 편안함과 죽음의 이미지, 즉 양극단의 감정이 뒤섞인 상태로 오랜 시간 마음의 상처를 쌓아온 것이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풍경이다. ‘나는 오로지 내 내면에만 있었다’는 이 심리 묘사는 작품 전반부에서 다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상상하며 읽는 것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사방이 꽉 막힌 절망의 풍경에서 현실로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장치가 죽은 부모님이 남겨준 충분한 유산이라는 설정은 소설로서의 흥미로움과 가치가 어느 정도 떨어지게 만드는 느낌을 준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당장은 한창 몰입감을 가지고 빠져 있던 독서에 찬물을 끼얹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유리방 안에 갇혀 어쩔 수 없이 견뎌내는 이미지로 내면의 우울한 풍경, 구체적으로는 불안감이나 분노를 그려내는 표현 등 주인공 내면의 심리 묘사는 수묵화에 대한 표현의 다채로움 및 깊이와 비견될 만큼의 밀도와 집중력으로 독자가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성과 감정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버리는 정신적 상황에 대한 감각적 묘사가 인상적이다.



단 한 획으로 대상의 외형적 특성과 내적 아름다움, 대상 주변의 분위기나 물리적 배경 정보까지 담기게 되는 예술의 경지를 차분하게 묘사해나가는 부분은 몇 번이나 반복되어 서술되는데, 반복으로 인한 피로감이나 지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예술의 경지를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도 그렇고 표면적으로 수묵화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상처 입은 내면의 공간에 휘몰아치는 자기 문제의 폭풍에 얽매여 괴로움을 견뎌내기만 하다가 다른 존재, 다른 세계를 서서히 받아들이면서 슬픔과 상처를 서서히 극복해나가며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삶의 생기를 회복해가는 심리 치료의 과정을 그려낸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 네이버 「리뷰어스 클럽」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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