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하는 철학자 - 운전이 어떻게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매슈 크로퍼드 지음, 성원 옮김 / 시공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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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연장된 신체처럼 취급되는 요즘, 스마트폰보다 먼저 인간에게 필수처럼,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정체성처럼 여겨지는 사물이 있으니 그것은 자동차다. 특히 우리나라는 허영심의 차원에서 더 심한 것 같다. 굳이 필요없는 고사양의 차를 무리를 해가며, 카푸어도 마다않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차를 굴리기도 한다. 여기에서 빈곤한 한국의 정신문화를 엿본다.

운전한다는 행위는 운전자 스스로가 상황을 보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다음 행위를 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기주도적인 행위로, 인간의 주체성을 키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차에 앉아서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히 수동적이다.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서 무엇이든 해야하기 때문에 주체성은 상실되고 정해진 미로를 더듬거리며 찾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또한 자동차이며 운전하는 행위인 것 같기도 하다.





도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시 인류는 생존을 위해 이동하기도 했지만 모든 경로를 스스로 설정하고 모험을 해야 했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인류가 자동차 안에서 운전이라는 행위를 통해 하는 이동은 발전이라기보다는 점점 퇴보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다. 자기주도적인 생각과 결정,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이동의 범위는 더 넓어지고, 어디든지 마음껏 갈 수 있는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세상이 점점 네트워크화되고 어디든 관리되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큰 틀에 갇힌 인간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오히려 도로 네트워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동차의 폭발적 보급은 포드식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통해 가능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주체적인 운전 행위나 자동차라는 연장된 신체는 자본주의라는 특정 체제가 만든 시스템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자신의 이동 능력이라든지 자유 같은 주제를 정체성의 차원에서 논한다든지 개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의 팔딱거림이 아니고 무엇일까? 결국 우리는 어딘가에 종속됨으로써 존재하는 처지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자율주행기술이 점점 발달하게 되면 결국 운전이라는 행위도 게임 같은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게임이라고 해서 무조건 낮잡아 볼 일은 아니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운전이라는 행위가 대단하지 않다는 인식이 보편화될 가능성도 높다.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거셀지는 미지수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가 될 공산이 크고, 그렇다면 우리의 운전 행위가 가상의 네트워크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또 자율주행에 몸을 맡긴 채 다른 가상공간에서 게임하듯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게임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는 식으로 삶의 방식이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운전이라는 행위는 큰 틀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보다는 더욱 존재적으로 소외시키고 소비주체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 네이버 「리뷰어스 클럽」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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