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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프랭크 틸리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평점 :
서양의 철학은 서양인들의 언어, 즉 ‘그들의 언어’로 ‘철학함’이 이루어진 철학이다. 그래서 번역으로 접하게 되는 서양의 철학은 물론이고 다른 학문들도 용어의 낯섦에서 일차적으로 이해의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언어를 자주 접하면서 그 뜻을 문장의 맥락과 그 문화권의 역사적, 사상사적 배경이라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파악하려는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틸리 서양철학사」는 훈련 교재로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이 비교적 매끄럽고 처음 읽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읽어나가면 적어도 그 흐름을 따라가기에 벅찬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원문의 탁월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뻔한 대답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 혹은 ‘진리 탐구의 도구’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인간과 사물과 현상에 대해 생각하고 정의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그 어원을 살펴보면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어떤 것들에 대한 지식을 열망하면서부터 생겨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되면 진리 탐구라는 거창하고 진부한 답이 쉽게 나오면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철학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그 선물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사용한 철학자들의 흔적이 바로 이 「틸리 서양철학사」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그리스 철학이 발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두려움과 상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신화’다. 이것은 미신에 가까우며 지금의 관점으로는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이다.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서 반복되는 현상과 사건에 익숙해진 인간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 의문이 체계적인 질문과 대답의 형태를 띄게 된 것이 철학의 기원이고, 이것이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최초의 철학 행위였다. 이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어떤 원리로 운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은 곧 모든 것은 변화하는가 고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實在)의 존재 여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고,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선과 악, 윤리적인 문제로 발전하면서 인간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곧바로 정치와 국가와 우주에 대한 문제로, 즉 인간을 둘러싼 유형, 무형의 관계들과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리스 철학의 시대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토대에서 발전했지만, 또 동시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그리고 중세시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사의 주도권은 그리스도교 신학 중심의 중세 철학으로 넘어간다. 교회 중심의 천 년의 중세 시대가 신의 은총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카톨릭의 타락으로 점점 마지막을 향해 갈 때에 세상은 두 가지 거대한 변혁의 바람을 맞게 된다. 바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다. 이 시기에 철학은 비로소 인간 자체를, 개인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양상을 전면적으로 띄게 된다. 하늘에서 땅으로 관점이 이동한 것이다. 이 흐름은 장차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주의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꽃을 피우며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잠재력이 폭발하면서 인류는 경험에서 이끌어낸 진리와 눈에 보이는 실용적인 것에 대한 맹신에 점점 빠져간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철학사는 이어지지만 이 책은 그 직전까지의 철학사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자연현상에서 시작해 인간과 사회, 국가, 종교, 다시 인간으로 이어지는 철학의 주요 관심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가 보이지 않는 실재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사상들의 전투처럼 이어져 왔다. 가깝게는 인생의 의미에서부터 멀게는 우주의 근원, 존재의 본질까지 다루는 ‘철학’, ‘철학함’은 인간이 다른 어떤 존재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게 해주었다. 역으로 어떤 존재보다 천박하고 가볍고 무의미할 수도 있음을 드러내주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철학사상의 역사가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지적 성취와 쾌락으로 이끌어줄 것이란 사실이다. 많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능력을 가장 세련되고 고상하게 사용할 수 있는 ‘철학함’의 방법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