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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조안 해리스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오늘은 찾아뵙는 날이 아니라는 거 저도 압니다. 신부님. 하지만 누군가 대화상대가 필요했습니다.' 프랑시스 레노 신부님, 탐식, 탐욕, 나태, 음란, 교만, 시기, 분노, 성서에 나오는 7가지 죄악 중에서 저는 요즘 탐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반성하는 의미에서 무분별한 외식을 지양하고 있으나 3일 연속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조금전 냉장고를 열었더니 초콜릿 시럽이 상했더군요. 지나친 탐식으로 지금 벌을 받고있는 건가요? 당신을 알게 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만, 이제 와서 리뷰를 쓰고 찾아뵙기에 너무 늦었다는 거 저도 압니다. 신부님. 하지만 누군가 대화상대가 필요했습니다. 초콜릿 시럽이 상했단 말입니다!
책 뒷표지에 이렇게 나와 있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소설은 쾌락과 사랑과 관용에 대한 찬가이다. 놓치지 말것. - 옵저버
레노 신부님, 정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당신의 선의를 의심부터 하고 보는 심술궂은 비안 로셰처럼 그렇게 생각할 리 없어요.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자의 의도를 잘 못 이해하는 거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책이 쾌락이 아닌 금욕에 대한 찬가이고 사랑하고 싶으나 끝끝내 사랑할 수 없는 마음,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용 보다는 자신의 고결한 신념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신부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어느날 갑자기 사육제의 바람과 함께 나타나 '이 답답한 동네에는 마술이 좀 필요한 게 아닐까' 혼자 지례짐작하고선 (돈도 많은 지 겨우 3일 만입니다) 2월 14일 성 발렌타인 축일에 '천상의 프랄린'이라는 초콜릿 가게를 연 다음, 인구라고 해봤자 겨우 200명도 안 되는 자그만한 마을을 뒤흔들어고 자신이 떠난 다음 뒷수습은 어떡하라고 '잠시만 머물자 바람이 바뀔 때까지만' 이따위 무책임한 말을 늘어놓나요?
편견은 가지기 싫지만 이 여자, 마녀같아요. 이상한 마술도 하는 거 같습니다. 흑마술만 위험한가요? 보통 사람이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제 집 드나들 듯이 훤히 들여다 보고 그에 맞춰 사람을 대하는 영악함을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거의 죄책감까지 느끼는 이 엿봄'을 포기하지는 않아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닳아빠진 도시여자에게 뭘 기대하겠어요. 아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걸요.
물론 그녀는 자신이 떠돌아다니게 만든 원인 제공자로 가엾은 어머니를 내세웁니다. 흔히들 하는 변명이죠. 어머니는 그녀와 달리 실제 마녀였대요. '그들은 일상으로부터 도둑들처럼 끊임없이 달아났고 안정적인 삶을 감당 못해 프랑, 크로네, 파운드, 달러로 바꿔 바람결을 따라 도망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삶은 멋진 모험이었다고 그녀도 인정은 하고 있어요.
어떤 이유인 지 모르지만 카드로 점을 치며 끊임없이 달아나기만 한 어머니와 달리 딸은 요리를 배우면서 정착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암에 걸린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그 소원은 비로소 이루어지죠. 이제는 어머니가 된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만은 그 아픔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처음으로 마을에 정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망할, 검은 옷의 사제가 문제예요. 죄송합니다. 신부님. 이 욕은 제가 한 게 아니예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서 기쁘군요. 나도 그렇습니다.
신부님과 비안,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 거립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어요. 초콜릿은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죠. 그러나 신부님, 저도 바보는 아니예요.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같은 영혼을 지녔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있는 물고기자리예요.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이 그러하듯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단번에 알아본 거죠. 한 사람은 금식을, 다른 한 사람은 초콜릿을 택했지만요.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두 사람은 거울의 양면같은 존재입니다.
심지어 그 여자는 하느님의 사제인 당신을 유혹하려고도 했어요. '그 사람은 나의 사제가 아니예요. 정말 나의 사제가 아니예요' 라고 말하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 다 거짓말이예요. 신부님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셔서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요. '맛보세요. 느껴보세요. 즐겨보세요. 전 이걸 보면 신부님 생각이 나요' 라고 지껄이면서 입을 꼭 다문 굴처럼 생긴 조그맣고 납작한 프랄린을 내밀었어요. 아니 감히 초콜릿으로 신부님을 유혹하려 들다니요. 괘씸한 여자 아닙니까. 굴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꼭 제 입으로 말해야 할까요?
그러나 알고보면 비안 로셰 이 여자도 불쌍한 여자입니다. 생의 직관(直觀)을 타고난 비범한 여자들이 그러하듯 외로운 여자예요. 농촌의 촌부들은 도시에서 온 이 세련된 여자를 사랑의 전령사로 여기지만 정작 자신은 평범한 남자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요. 잠시동안 떠돌이 집시인 루를 좋아하지만, 글쎄 그게 사랑일까요? 나아가서는 루와 조세핀에 대한 질투에도 휩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가졌거든요.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아이라는 신비한 존재가 있어요. 그녀는 모성으로 자신을 완성합니다.
그럼 신부님, 당신은 무엇때문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거죠? 무엇때문에 금식을 하고 커피와 물만으로 생활하며 강도높은 노동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려는 건가요? 사람들의 말처럼 어쩔 때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 거 같지도 않아요. 도대체 당신이 그토록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찾으려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끊임없이 말하는 그 '정갈함'이라는 건가요?
그에 대한 답으로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놀랄만한 진실이 밝혀집니다. 어쩌면 짐작했던 바이기도 하구요. 세상에 드러났을 때 그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했던 사실들이 폭로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신에 대한 믿음때문에 혹은 외로움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고 살아가요. 그러나 누가 그들을 비난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값을 치르며 평생 십자가를 지고 살아왔는데 말이예요.
저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무스카의 죄를 이해한 신부님처럼, 어머니를 용서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처럼, 저도 알 거 같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 말이예요.
그러나 신부님, 당신은 그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심성이 꼬일대로 꼬인 작가 조앤 해리스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착한 줄리에트 비노쉬는 준비해 놓지도 않았어요. 당신이 유혹이라는 덫에 걸려들자 마자 실컷 조롱하고 비웃은 다음 내쫒아 버립니다. 당신은 꼬리를 내린 개처럼 달아났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알까요? 그 고통이 조앤 해리스 방식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당신이라는 존재가 없는 이상 비안 로셰는 이 마을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자 허무함까지 느끼는 거 같았어요. 이제는 금욕이 그리워질 차례입니다. 그러니 신부님 돌아오세요. 이 마을은 본래부터 당신의 것입니다.
신부님 아무래도 당신과 저는 너무 늦게 태어났습니다. 때로는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광야의 사람들이 그리워요. 이 쓰레기 같은 이 세상에서 '거칠고 청결한 구약(舊約)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건 너무 늦은 깨달음인가요?
그렇다면, 내가 평생 믿어왔던 것들 -죄와 구속과 육신의 고행에 관해서- 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셈이오, 그렇지요?
두 분은 그런 믿음을 가질 자격이 있으시다고 생각해요. 그 믿음이 행복을 주기만 한다면.
이런, 무례한 질문이 아니길 바라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소?
전 행복해지는 거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걸 믿어요. 행복. 한 잔의 초콜릿처럼 단순하면서도 마음처럼 복잡 미묘한. 씁쓸한. 달콤한. 살아있는.
레노 신부님, 어쩌면 비안 로셰 이 여자의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믿음이 행복을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목적을 잃지 않을 수 있겠죠. 내가 사는 방식이 옳은 지 그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만큼 인생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행복을 찾는 것도 중요할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세요?
당신이 돌아와봐야 알겠지만 사순절의 바람과 함께 도착한 모녀는 행복을 찾은 거 같습니다. '좋은 바람이 온다. 상쾌한 바람이 온다. 내 삶이 나를 부르네' 소설은 아이를 재우는 어머니의 노래로 끝이 납니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궁금하시죠? 들려드릴게요. '지금만큼은 이 노래가 자장가로 들리기를 바란다. 지금만큼은 바람 소리가 안 들리기를 바란다. 지금만큼은 - 제발 이번 한 번만큼은- 바람이 우리를 떼어 놓고 가기를 바란다.'
저도 이번 만큼은 그녀가 정착을 하고 바람 소리에 현혹되지 않은 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 바람이 좋은 바람이라 하더라도, 아니 좋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시인 남진우는 폴 발레리의 말을 인용해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기가막히게 천명한 바 있죠.
기욤의 말처럼 '인생은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리고 이 소설 '초콜릿' 또한 깜짝 놀랄만한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현대에서 지극히 구약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부님 당신이죠. 그러니 신부님 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오세요. 이 글은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때늦은 고해성사이고 부칠 수 없는 러브레터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참,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가까스로 반으로 줄였는데 알라딘이 잡아먹어버렸어요. 배가 고파서 더이상 쓸 수가 없군요. 금욕이고 뭐고 밥부터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물론 당신을 존경하지만 다 행복하자고 하는 짓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