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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ㅣ Mr. Know 세계문학 45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무식한 일이다. 나는 안톤 체홉의 소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 '갈매기'나 '벚꽃동산'같은 연극만 봤을 뿐이다. 그리고 저 정도의 연륜이 나오려면 오십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뿔사, 그러나 그는 44살의 나이로 죽었다. 줄리아 하트 콘서트에서 정대욱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말한 적이 있다. 꼭 읽어보라고. 그 후로 난 서점에 갈 때 마다 습관처럼 안톤 체홉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올 8월 '열린책들'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표제작으로 소설선집이 나온 걸 알았다. 3,4쪽 분량의 손바닥만한 소설부터 60쪽에 가까운 중편소설까지 대표작이 고루 실려있었다. 작고 가벼워서 출퇴근길에 읽으면딱일 거 같다. 물론 나는 늘 하던대로 침대에 누워 읽었다.
본업이 의사라 그런지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냉정하게 인간과 사회를 들여다 보긴 했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를 건드리는 손길은 의외로 따뜻했다. 젊은 날 생계를 위해 유머작가로 활동한 만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들을 생기발랄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마스크'나 '어느 관리의 죽음' '실패'가 그러하다.
나는 안톤 체홉을 읽기 전까지 러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이나 떠는 줄 몰랐다. 사실 조금 실망했다. 러시아 작가를 별로 알지 못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마야코프스키를 읽으면서 굉장히 심각한 햄릿형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힌 얼어붙은 밤, 인테리켄챠는 검은색 모피코트를 두르고 보드카를 마시며 깊은 사색에 잠겨 민중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또 번민하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거 원 돈 키호테형 인간들이 아닌가!
그러나 사소한 일상과 그 보다 더 사소한 사람들 속에, 그 우스꽝스런 야단법석 속에, 떠벌거리는 말들 속에 지독한 비애가 뿜어져 나왔다. 러시아 남자들의 평균연령을 깎아먹고 과부와 아빠 없는 불쌍한 아이를 만들면서도 절대 끊을 수 없다는 보드카 맛처럼 슬프고 괴로우며 그래서 너무 아름답다. 나는 마셔본 적 없기 때문에 짐작만 할 뿐이다. 분명 러시아 사람들은 소주보다 더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소설을 쓰고... 또한 사랑도 혁명도 그렇게 치렀을 것이다.
그런 반면에 '농담'이나 '어느 여인의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농담 같은 단편들로 서정적이고 시적이고 감상적이다. 나이가 들어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추억한다.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고 사랑은 일상으로 변하고 지나갔던 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은 그렇게 지나간다.
단편 '농담'에서 나는 무서워하는 나젠까를 설득해 썰매를 타고 빠르게 내려간다. 그리고 바람 속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쟈'라고 속삭인다. 읽는 나도 나젠까도 그게 진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망할까봐 차마 다시 확인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나젠까는 썰매만 타자고 졸라댔다. 그리고 더 이상 썰매를 탈 수 없는 계절이 오면서 바람이 실어다 주는 그 사랑 고백도 끝이 난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이면 다른 도시로 떠난다. 슬퍼하면서 다른 먼 곳을 바라보는 나젠까. 그 때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쟈'라고 말한다. 이제 나젠까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너무나도 기쁜 얼굴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그 말이 처음부터 농담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지금도 왜 그런 농담을 진담처럼 내뱉았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나젠까는 이미 진작에 결혼했다. 아마 화자인 '나' 역시도 결혼했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조금 긴 중편소설 '6호 병동'과 '검은 수사'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다 철학적이고 회의적이다. 두 주인공 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치고만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 둘 다 죽는다. 한 사람은 정신 병동에 갇힌 채 죽고 나머지 한 사람은 헛것을 보다 죽지만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얘기하려면 너무 길어져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책 끄트머리에 실려있다. 사는 게 권태로운 유부남 구로프는 휴가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나와 만난다. 처음엔 물론 단순한 정사였지만 이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기 전에도 불행했지만 이제 사랑에 빠지고서도 불행한 두 사람. 조만간 끝나고 말 열정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끝날 땐 끝나더라도 오늘은 안나를 만나러 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기온은 3도인데, 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 구로프가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 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단다.'
눈이 내릴 수 없는 따뜻한 날씨에 눈이 내린다. 그건 땅과 하늘의 기온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게 인생이다. 실온과 체감온도가 다른 인생. 이 비슷한 구절은 '검은 수사'에도 나온다.
'이보게, 알 수 없는 건 말이야...'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춰 서서 그가 말을 꺼냈다. '땅의 표면이 이렇게 얼었는데도, 막대에 달린 온도계를 지상에서부터 2사젠 위로 올려 보면, 그곳은 따뜻하거든... 대체 왜 그런가?'
물론 알 수 있지만 또한 알 수 없다. 대기권의 온도가 지상보다 따뜻한 건 과학이지만 그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과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신비로운 그 어떤 것이어야 한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을 바람이 사랑을 고백했다고 믿는 바보 같은 여자의 진담처럼 말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은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에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농담'을 불어넣고 44살에 죽었다. 나는 이 농담이 너무 웃기고 비극적이고 아름다워서 조금 울었다. 아마 내 옆에 보드카가 있었다면, 적어도 쐬주라도 있었다면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처럼 화려하게 꽃피우고 사라진 그 농담에 경의를 표하며 한 잔 정도는 마셔줬을텐데. 맥주로는 사실 조금 싱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