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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다. 모두들 점심을 먹고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 낮잠을 자는 사람, 인터넷 서핑을 하는 사람, 그 짧은 시간에 당구를 치는 사람, 아니면 계속해왔던 업무를 연이어 하는 일벌레들 각양 각색이다.

이쪽 부서로 오면서 점심시간은 점심먹는시간+휴식시간이라는 개념이 확실해졌다. 그 전 부서에서는 점심시간이라는 개념없이 시시때때로 비정기적으로 식사를 하곤 했다. 사무실 근무가 아니라 현장에서 근무를 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여건에서 생활을 하였는지 참 넌더리가 난다. 낮에 밥을 먹을라 치면 특히 요새 같이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하면 없었던 파리들이 들끓고 그렇지 않아도 깨끗하지 못한 식당에 파리까지 날아와서 점심을 같이 먹으니 너무너무 밥맛이 좋았다. 그러나 어쩔수 없었다. 시간도 없었고 근처에 다른 식당이 없었으니까.

식당이 이런 일반음식점 사업자등록을 가지고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니고 공사현장에서 말하는 흔히 '함바집'이라 일컫는 곳이다. 공사기간중 작업인부들이 간편하게 식사나 간식을 해결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랄까?그곳에서 하루세끼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새참 (이걸 또 '새꺼리'라 부른다)도 해결하고 인부들 영양보충이 필요할 때면 저녁에 삼겹살도 구워먹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항상 공사현장엘 가면 그 함바집 음식이 어떤가가 제일 관건이었다.

좀더 시간이 가고 여름에 장마가 시작되면 그 전에 그곳은 물난리는 또 물난리대로 겪었었다. 공사현장에 여러번 있었지만 요렇게 게으르고 지저분한 현장소장은 처음 봤더랬다. 비가 많이 와서 꼭 고생을 하면 그 이후를 대비를 해서 정비를 한다던가 다른 특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건만.. 그 때 뿐이었다. 소귀에 경읽기 바로 그 것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15살이상 차이가 난지라 더이상 이야기를 못했지만 말이다. 하긴 현장 사무실에 가보면 진짜 돼지우리나 다름없어서 하도 갑갑해 내가 직접 직원들을 데리고 청소도 챙기고 그랬으니 말이다.

그 때 그 열악한 현장을 생각하니.. 지금도 뷔페식으로 반찬을 뜰때 고등어 조림에 앉아 있는 새파리가 생각나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 이 부서로 발령받아 생활해보니 그런 먹고 쉬고하는 것들이 많이 비교가 된다. 같은 조직, 같은 직장이라도 내가 다니는 이 조직은 조직이 방대해 전국적이다. 그래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근무조건이 천차만별이다. 군대생활에서 모토는 '줄을 잘 서야 한다'라고 했잖는가? 그건 비단 군대생활에서 통용되는 말만은 아닌것 같다. 갑자기 점심먹다가 포만감에 그 전에 있던 곳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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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지가 9개월이 되었다. 문득 문득 아버지에 대한 생각들이 난다. 집에 있을때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또 아버지가 계신 집에 와 잠들기 전에 그리고 하루하루 생활하다가 수없이 아버지에 대한 모습들이 끊이질 않는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약 1년 동안은 그분들의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고들 한다

아버지는 고혈압계통의 뇌경색증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거동이 불편하여 노인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나의 생일날.. 그날은 업무적으로 내가 많이 바빠서 아침에 집사람이 끓여준 미역국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일치감치 일요일 날인데도 불구하고 출근을 했던 날이었다.

살아계실때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않좋으셨다. 노인병원에 가실때도 당신이 집에 누워서만 생활하시기에 힘들고 따분하고 천정만 바라보는 하루하루가 지겨워 내가 그쪽으로 모신게 아버지 병수발하는 어머니에게도 괘팍한 아버지의 성질에 힘들어하는 동생들에게도 지루한 일상을 보내시는 아버지에게도 서로가 좋은 부분이 생긴다는 결론하에 그쪽으로 모신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못내 그 생활도 진절머리가 나고 참지를 못하셔서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면 못 계시겠다며.. 집으로 가실 것을 고집하셨다. 그러나 아픈 당신도 당신이시지만 병수발에 어머니까지 몸이 약해지시고 동생들이 힘들어 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30여년 이상 지켜본 나로서는 벌써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법적으로는 부부였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하인 부리듯이 여겼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들을 위해서 가정을 져버리지 않는 분이셨기에 그 상황을 충분히 아는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집으로 모신다는 것은 병세의 악화와 집안식구들을 같이 끄집어 늪속으로 들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매주 갈때마다 아버지와의 입씨름은 끊이질 않았고 병원에서 나올때는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나도 그분의 아들이기에 정말 힘이 들었다. 어떻게 하야할지를 몰라서 차라리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병수발에 전념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스러운 마음이야 왜 안들었겠냐만 그 나름대로의 사정사정이 그 현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어쩌다 주말에 사정이 생겨서 못가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병원에서 나를 찾는 간호사의 전화가 왔었고 그때마다 이번주에는 꼭 들르겠노라고 약속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방문에 만족하지 않으셨고 욕까지 해대시며 당신을 집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나도 그런 아버지를 볼 수 가 없었다. 그 사실을 집사람과 심각하게 고민하고 드디어 어머니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한 어머니께선 그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을 하셨다.

마침내 몇달이 흘러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셨고 난 주말이라도 내가 있는 내집으로 모셔야 겠다고 생각하고 내가 사는 집으로 주말마다 모셨지만 아버지는 불편해 하셨는지 더이상은 내집에 안가겠다고 하셨다. 난 어머니에게 부탁을 하였고 어머니도 마음이 여리신 분이라 승락을 하셔서 집에서 생활을 다시 약 1달 보름동안 하셨다, 그러나 집에 오신 이후로 아버지는 처음 몇일은 식사도 잘하시고 변도 잘보시는가 했더니 병원에 계실때 보다도 몸이 더 않좋아지셔서 급기야 응급실에 실려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응급실에서의 7일동안의 생활후 다시 원래 계시던 그 병원으로 모셨다. 거기에 가시는 것을 아버지도 더이상 반대를 안하셨다. 병원에 계신걸 또 주말마다 확인하고 병문안가고 찾아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시고 병세가 호전되는것처럼 보였으나. 아버지는 몇번의 전화.. 지금 생각해보면 돌아가시기 전에 분명히 하실 말씀이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난 그전화를 직접 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온 전화라는 것만 확인했을뿐 주말에 가서 아버지를 봐야 되겠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필 주말에 ... 병원에 내가 갔어야 할 그 날.. 난 큰 불효를 저질렀던 것이다. 아버지는 저녁식사도 잘하시고 간병인과도 가벼운 담소도 나누시고 자리에 눕고 취침을 청했는데 갑자기 기침이 심해지시면서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셨고.. 끝내는 가족 어느 누구도 없는 곳에서 이세상을 떠나셨다..

요즘은 직장일로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곳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나오고 아버지의 잔상들이 남아있는 그곳에서 아버지의 살아계시던 그 모습들이 너무 자주 생각이 난다. 그냥 죄스럽고 미안하고 불쌍한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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