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서재의 달인이 되다!

 

이번에는 포기했다. 워낙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여름을 지나서는 제대로 된 글을 올리지 못했다. 다행히 올해도 서진의 달인으로 선정해 주었다. 다행이고 고맙다. 시간도 참 빠르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달려 왔다. 뒤돌아보니 아득하다. 이곳도 나의 역사이고 생각의 궤적이 담겨 있다. 나중에 정리를 해야겠다. 




그동안 3년 동안 올린 글을 년간통계를 통해 비교해 보았다. 2011년은 올린 글이 1,318개이며, 글자수는 904,320. 엄마를 부탁해와 비교하면 7.85권을 만들 수 있고, 그해 알라디너 중에서 10번째 많은 글을 올렸다. 방문자수는 73,018명이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썼단 말인가? 


2012년을 보자. 올린 글이 383개이며, 글자수는 784,041이며, 엄마를 부탁해와 비교하면 6.81권이다. 포스팅 수는 적지만 글자는 1200 정도의 차이 뿐이다. 이건 글을 쓸 때 아무렇게 쓴 글이 아닌 제대로 된 글, 신경을 써서 쓴 글이란 뜻이다. 하여튼 방문자가 175,129명이다. 방문자수는 2.5배에 달한다. 그만큼 양질의 글이 많다는 뜻이다. 


그럼 작년 통계를 보자. 글수는 351개로 작년보다 약 32개가 적다. 글자수는 618,544로 1700자 정도가 적다. 엄마를 부택해로 비교하면 5.37권이다. 방문자 수를 비교하면 총 141,995며이다. 작년보다 74,000 정도가 적게 왔다. 갈수록 적게 글을 쓰는 대신 많이 글 수에 비해 많이 찾아 온다. 이유는 단 하나, 제대로 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많은 사람이 자주 찾지만 질이 낮은 글은 한 번 외에는 다시 찾지 않는 법이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자신이 없다. 많은 사역과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감히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서재의 달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말이다. 지켜질지는 미지수지만 하여튼 달려가 보자. 




내친김에 내가 좋아하고, 나의 글쓰기에 도움을 준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빼고 글쓰기를 말하지는 못한다. 두번째로 좋아하는 작가는 송숙희, 이분의 책은 모두 살 작정이다. 최고의 멘토다. 특히 [책쓰기의 모든 것]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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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이 존 버니언의 작품


존버니언을 빠뜨리고 영문학사를 말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영어서적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번니언의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1678년))은 대단하다. 크리스찬이란 사람이 장망성(장차망할 성)에서 빠져나와 십자가 아래서 짐을 내려놓고 좁은 문을 통과하여 천국까지 이르는 여정을 모험형식을 빌어 기술한 책이다. 여러 판본이 있지만 세권의 책을 권한다. 포이에마에서 나온 것과 엔크르스토, 섬앤섬에서 나온 이윤기의 천로역정이다. 마지막으로 영문판과 겸하여 셋트로 주는 더클래식도 추천한다. 엔크리스토와 이윤기의 책은 잘 알려진 1판과 2판을 겸하여 실어 두권을 사는 득을 얻을 수 있다. 번역은 다들 무리가 없으니 어느 것을 선택해도 좋다. 

















존 버니언에 대해 약간 알 필요가 있다. 버니언은 종교적으로 비국교도이며, 침례교도이며, 청교도다. 학문적으로 초등도 졸업하지 못한 저학력의 소유자다. 요즘 고등졸업 수준정도에 비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서 영문학사의 한 획을 그을 정도의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는 천재적인 작가이자 상상력에서 있어서 탁월한 존재이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만 카톨릭의 그늘에서 벗어나 영국 자체의 교회 수장이 된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것이 영국의 국교인 국교회다. 교리적으로는 대부분이 카톨릭의 영향 아래 있으나, 정신적으로 독립적이고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개혁주의 노선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칼빈의 개혁주의와 카톨릭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버니언은 국교회가 아닌 청교도이며, 비국교도이다. 천주교가 영국에서 핍박을 받은 것처럼 비국교도들 역시 핍박을 받아야 한다. 



크롬엘에 의한 청교도 혁명이 성공을 이루면서 영국은 완전한 개혁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나라가 된다. 그러나 크롬엘 사후 청교도들은 이분사분 나위어져 결국 카톨릭을 대변하는 찰스2세가 등극한다. 찰스 2세의 통치기간인 1660년에서 1685년은 영국의 최대 호황기였다. 프랑스와 스페인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식민자가 크게 확장되었고, 식민지 무역을 통해 수입이 늘어 났다. 


그러나 불행히 친카톨릭파였던 찰스2세는 개혁성향의 의회와 잦은 충동을 했고, 후임인 아우 제임스 2세 역시 공개적인 카톨릭 신봉자였다. 제임스를 의심산 의회는 결국 제임스를 외국으로 추방시킨다. 후에 제임스의 딸인 메리가 왕위에 올라 명예혁명이 마무리 된다. 명예혁명은 친카톨릭파인 제임스2세를 추방하고 반대 세력들이 1689년 1월 22일 왕위를 윌리엄과 부인 메리에게 이양한 것이다. 명예혁명의 가치는 의회가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법을 세우고, 그 토대 위에 왕이 다스리는 형태이다. 


존 버니언의 생물시기는 1628 ~ 1688년이다. 즉 찰스2세가 통치하는 시기다. 친카톨릭적 성향의 찰스2세가 비국교도들을 가차 없이 핍박하고 카톨릭세력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신앙양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던 버니언은 붙들려 감옥에 들어 간다. 성경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버니언은 성경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쓰게 된다. 12년의 감옥 생활로 인해 마음이 지치고 가족들은 거리에 내몰리는 상황이 되었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극에 달했다. 감옥에서 가족을 돌보지 못한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한 책이 '죄인 괴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외에는 영적인 통찰력이 탁월한 '거룩한 전쟁'과 '하늘문을 여는 기도' 등은 꼭 필어야할 필수도서다. 천로역정으로 대변되는 버니언의 저서들은 이 땅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으며, 이 땅의 불완전함을 인식 시킨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과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관점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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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소설에 대한 간단히 살펴보기


17세기 영국은 격동의 세기를 보낸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 후 수백년동안 지속되었던 천주교 영향에서 벗어 난다. 그러나 크롬멜의 사후 리더십의 부재로 왕정복고가 일어나 다시 구 전통으로 되돌아 간다. 헨리8세의 주도 아래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명분이 없는 변화 였다. 수장령의 선언 이후는 영국은 형식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지배를 벗어났지만 국교회 형식 자체는 다분히 로마적이다. 이러한 성향은 왕정복고후 다시 일어 난다. 


그러나 한 번 자유를 맛보고, 신식 사상을 체험한 영국인들에게 카톨릭과 너무나 닮은 국교회는 구습 그자체였다. 영국 황실은 백성들의 반발을 예상하고 복고 초기는 강력한 물리적 강압 통치를 시도했다. 강압통치는 또다른 반란을 일으키는 법이다. 근대 문턱에 자리한 영국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산업혁명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과학의 발달, 항해술의 진보, 시민정식의 고취 등은 구 전통에 대한 혐오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황실은 더이상 강압 정치로는 나라가 평안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청교도의 영향이 어느정도 잊혀질 만한 시기라 안도감도 자리했다. 이러한 시기에 비국교도에 탄압이 줄어들고 관용적 정치를 시도한다. 


국가의 강압이 사그러들자 시대를 풍자하는 소설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비국교도들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로빈슨 크루소>를 저술한 다니엘 디포와 해악과 풍자로 국교와 황실을 비판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다. 이들은 소설을 통해 국교회의 부패와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특히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금서가 될 정도로 당시의 부패한 황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풍자한다. 시대의 부조리에 당당하게 맞섰든 작가들이다. 

















리처드 스틸과 조지프 애디슨 역시 <태틀러>와 <스펙테이터> 등에서 활동하면서 물오르던 시민정식을 고취 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청교도 목사였던 리처드 스틸은 근면과 성실한 그리스도인 상을 강조하며, 금욕적이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했다. 그의 책 두 권의 현재 번역되어 있다. <흐트러짐>과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다. 요세프 애디슨은 리처드 스틸과 돈도한 우정관계를 유지했으며, 시인이며 극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불행히도 그의 책은 아직 번역된 것이 없다.


그 다음으로 조목할 작가는 알렉산더 포프다. 일반 소설이 아닌 논문과 전기형식의 책을 서술한다. <머리카락의 겁탈>, <인간론> <도덕론> 등이 있다. 그는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수장령이 내려지면서 반천주고 법안으로 핍박과 고통의 시기를 보낸다. 그는 어린 시절 곱사등이란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러한 결함이 그를 문학과 공부에 매진하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지만고에서 그의 시를 선별하면 <포프시선>으로 번역 출간했다. 영어권에서 포프의 시는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인용된다. 동시대 작가였던 루소와 조나선 스위프트는 포트의 시를 높게 샀다. 



















18세기 영국 문학은 탈권위적, 탈 전통적 성향이 짙다. 이러한 성향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일어난 자유와 주체 정신의 고양의 결과다. 특히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인간이성에대한 맹신은 20세기까지 이어진다. 중세 말기에 일어났던 철학과 과학의 발달의 결과다. 영국에서 경험주의 철학이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헨리 8세가 일으킨 수장령의 영향이다.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로마 카톨릭에서 벗어난 독립적 존재로서의 시도는 이후 일어난 청교도 혁명과 자주적 정신을 고취한 필연으로 이어진다. 18세기 영국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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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다시 읽기


대부분의 로빈슨 크루소는 재편역 되었다. 나의 기억 속 로빈슨 크루소는 그야말로 생존게임의 승자였다. 무인도에 버려져 홀로 살아가는 즐거운 상상의 존재였다. 만화로 보았던 로빈슨 크루소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제작되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아이들에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려주는 모험 이야기도 충분한 것이다. 시간과 날짜를 계산하고, 밭을 일구고 옷을 입고, 동물들과 친하게 지내는 법도 배운다. 그런데 혼자 있을 아프면 어떻하지. 살며시 걱정도 든다. 이런 정도의 소설로도 문학작품의 효과는 충분히 발휘한 셈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인 글이 박상준 박경수의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저자인 다니엘 디포가 현재의 어린이용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원작을 아무렇게나 축소시키고 편역한 부분에 대해 격노할지도 모른다. 마치 호랑이에게서 이빨을 다 빼버린 경우랄까. 하여튼 그런 것이 된다. 원작을 읽지 못하면 호랑이의 이빨에 씹히는 두려움을 체험하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는 반드시 원작을 읽어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원본으로 완역된 책들은 펭귄클래식에서 번역된 것이있고, 을유문화사에서 번역한 것 역시 번역이 깔끔하다. 루소는 에밀에서 어린이가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을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로 꼽은 것만 봐도 이 책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이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 홍종락이 번역한 책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 이후 영국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중상주의와 중산층의 부흥을 알려준다. 또한 장로교도 였던 다니엘 디포는 신앙적 관점에서 경건한 삶을 추구한 무인도의 삶을 보여 준다. 고독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했던 저자의 자전적 관점에서 쓰여진 소설이기도 하다. 종교적 관점에서 세밀하게 기록된 책이 <로빈슨 크루소- 무인도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야기>다. 

















<로빈슨 크루소- 무인도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야기>의 일부


1651년 9월 1일, 런던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배가 강 하구를 나서자마자 바람이 일더니 파도가 무시무시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바다에 나서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말도 못하게 심한 뱃멀미가 났고 완전히 겁에 질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심각하게 돌아보았다. 

‘하늘의 심판이야. 경솔하게 아버지 집을 떠났으니 당해도 싸지.’

아버지의 눈물을 멸시하고, 어머니의 간청을 무시하고, 내 의무를 저버린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폭풍은 점점 강해졌다. 바닷물은 엄청나게 높이 일어났고 파도가 하나 덮칠 때마다 그대로 우리를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배가 파도의 골로 내려 갈 때에는 그대로 잠겨 버릴 듯했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여기서 살려 주시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절대 배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다. 진정으로 회개한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그 생각은 폭풍이 치는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바람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가라앉자 내 마음은 이내 달라졌다. 이윽고 근사한 저녁이 찾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가르며 태양이 졌고 이튿날 아침 똑같은 모습으로 떠올랐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바다는 잔잔했다. 햇살이 바다를 비추자 처음 보는 멋진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친구가 와서 말했다. 

“어젯밤 작은 돌풍 때문에 자네 겁먹었지, 아닌가?”

“작은 돌풍? 그건 끔찍한 폭풍이었어!”

그가 대답했다. 

“폭풍이라니! 그걸 폭풍이라 부른단 말인가? 그런 작은 돌풍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자, 한잔 하고 잊어버리세.”

나는 모든 선원들이 가는 길로 갔다. 술이 나왔고 마시고 취했다. 그리고 하룻밤의 방탕함과 함께 전날의 모든 회개와 결심도 잊어버렸다. 바닷물에 삼켜질 거라는 두려움은 사라졌고 이전의 욕구들이 다시 물밀듯 되돌아왔다.

구멍이 났다!

그러나 내 앞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게 만드시려고 그분의 섭리 가운데 작정하셨던 것이다.

바다에 나선지 여섯째 날, 우리는 야머스 항에 도착했다. 날씨는 잔잔했고 폭풍이 지나간 후로 얼마 진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기 때문에 닻을 내리고 거기서 7-8일쯤 머물러야 했다. 4-5일을 기다리고 나자 바람이 상당히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주 강해졌다. 그러나 정박지가 괜찮았기에 선원들은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뱃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8일째 되는 날 아침에는 바람이 심상치 않아 선원들 전부가 달려들어 모든 물건을 단단히 묶어야 했다. 정오가 되자 파도는 굉장히 높아졌고 선장은 두 번째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날씨는 끔찍한 폭풍으로 바뀌었다. 선원들 얼굴 위로 공포가 어렸다. 선장이 선장실을 들락거릴 때 나는 그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모두 죽게 생겼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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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2014-11-0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은 처음 올리네요^^˝ 책 정보 얻으러 눈팅 하다가 이상하게 로빈슨크루소가 끌려서 읽었는데 어렸을 때 읽었더거랑은 차이가 커서 놀랐습니다... 상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더라구요.. 허나 종교적인걸 떠나서 스토리자체가 재미있더군요. 책속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잘 하는 편이라 저 스스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거기다 `또다른 모험`이라는 무인도 탈출 후의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고 어제부터 읽고 있습니다. 덕분에 고전문학이 재밌다는 걸 새삼 알게 됐네요^^˝ 감사드려요

낭만인생 2014-11-10 16:47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책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좋네요.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로


아라비안나이트는 <천일야화>와 동일한 뿌리에서 시작했지만 약간 다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중동 지방에 내려오는 구전문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영어로 번역하면서 아라비아 지방의 이야기를 밤에 나눈다는 뜻에서  Arabian Nights로 불렀다. 모두 280여 편이나 되는 긴 이야기이다. 현재 우리날에 있는 아라비안나이트는 리처드 F. 버턴에 의 편집된 영문판을 번역하여 들여온 곳이 대부분이다. 

















영국의 외교관이었던 리처드 프랜시스는 버턴(1821-1890)에 의해 영문으로 번역되어 서구에 알려 진다. 번역 초기 아라비안나이트는 금서 목록에 들어갈 정도록 내용이 파격적이었는데, 청교도 문화의 금욕적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노골적인 성적 표현은 달갑지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범우사 판본이 버턴의 책을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 이야기 묶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알라딘의 마법 램프, 하늘을 나는 흑단마, 뱃 사람 신밧드의 모험 등이 나온다. 인도와 서구의 중간쯤 되는 지역에 위치한 중동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도, 자체적으로 독립적 문화를 일구었다. 이슬람이란 문화가 이러한 많은 이야기를 창조해 낸 것이다. 


버턴의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 시리즈















































<천일야화>는 버턴보다 약 180년 정도 이른 시기에 갈랑에 의해 영어로 번역한다. 시리아본에 해당하는 단편적 이야기를 갈랑이 번역한 것이 <천일야화>로 이어지고, 후에 보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이집트본을 버턴이 번역한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임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 처럼 발전 한다. '열린책들'은 갈라의 <천일야화>를, 버턴은 이집트 판돈을 번역하여 <아라비안나이트>로 범우사에서 번역했다. 한 이야기 두 갈래의 판본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좋겠다.


열린 책들에서 출간한 갈랑의 <천일야화>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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