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카메라가 좋아지면서 DSLR은 잘 들지 않는다. 꼭 찍어야할 때나 할 곳이 아니면 들고 나가지 않는다. 대신 수시로 꺼내 찍을 수 있는 폰 카메라를 사용한다. 최근들어 폰 카메라의 사양이 놓아지고 색감도 좋아지면서 기술적인 처리를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면 DSLR은 더 안들고 다닌다. 


그냥 찍는다. 한 달만 지나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을 담는다. 희소성이 사라진 이 때 셧터 누르는 것을 자제할 이유가 없다. 그날도 고속도도를 주행하다 셧터를 눌렀다. 여기가 어딜까?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 빗방울이 보이는 이곳은 어딜까? 한참을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또 한 장의 장소확인불가의 사진이 추가된다. 











일주일을 비운 집을 다시 찾았다. 이래저리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책은 언제나 좋다. 부산에서 구입한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와 <빈방>, 그리고 김석년 목사의 <질문하는 믿음>과 <질문하는 교회>가 도착해 했다. 김석년 목사는 글이 바르다. 단순한 옳음과 바름이 아닌 삶이 정직한 목사다. 목사가 무작위로 욕을 먹는 시대에 그는 곳고 바르게 살아간다. 글에 그의 삶이 읽힌다. 고 박완서 선생님의 <빈방>은 말씀 묵상글이다. 


박완서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울었다. 아니 물었다. 평범한 삶은 정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고난과 불가항력적 상실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람은 왜 불까? 태양은 왜 떠오르는 것일까? 밥은 왜 먹어야할까? 모든 것이 의아하고 의심스럽다. 


"저 바다는 정말 저기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은 이 세상에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41쪽)


질문하는 것. 그것은 살고 싶다는 말이다. 무의미하게 방치된 것들에 대해 의미를 찾아 주려는 몸짓이다. 질문은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김석년 목사의 질문하는 책들은 진리라는 명분하에 도무지 변강부회같은 설교와 신앙을 되돌아 보라고 충고한다. 질문한다고 변하지 않는다. 질문은 질문자의 삶을 변화 시킨다. <질문하는 믿음>이 믿음의 대상에 예수에 대한 성찰이라면, <질문하는 교회>는 이 시대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늘이 간다. 또 오늘이 온다. 삶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가 묻는다. 왜 사냐고? 네가 믿는 진리가 참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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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6-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상실의 고통에 괴로워 할때 박완서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었어요..

낭만인생 2017-06-27 19:58   좋아요 0 | URL
공감이 되는 내용이 많네요...
 

한경오. 그러니까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가 수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단순한 기사 하나에도 소위 문빠 알려진 이들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그런데 오늘 전 .. 편집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어이 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주장은 문빠들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고, 그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분히 사변적인 이야기로 끌고 간다. 그런데 한경오여 생각해 보자. 왜 문빠들이 화를 내는가? 한경오가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기사를 잘못 써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문통이 잘하고 있는데 왜 욕하냐는 것이다. 문통을 공격하려면 그 이유부터 정확하게 밝히고 옳고 그름을 따지라는 것이 소위 문빠들의 포화 이유다. 가당치도 않는 이유로 공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들...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그들이 한경오를 공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노통이 서거할 때 그들이 보인 배신과 조롱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중동과 한패인 것처럼 거침 없이 노통의 죽음을 조롱했지 않는가? 그럼 묻는데? 왜 그렇게 했는가? 물론 노통의 정책은 어떤 면에서 실패한 것이다. 진보 보다는 보수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정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바로 그 지점에서 한경오는 조금도 노통을 배려하지 않고 공격투로 일관했다. 노사모는 분노했다. 노사의 전통을 이은 문빠들도 그 당시를 기억한다. 그러니 한경오는 문빠들의 공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 그대들을 더 이해할 수 없다. 


노무현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옳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문통의 정책을 이해할 수 있다. 노통은 바보였지만 문통은 바보가 아니다. 문통은 야누스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 난 문통을 믿는다. 그리고 노통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그 '이상'을 사랑한다. 


최근에 노통의 책들을 읽으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새록새록 깨닫는다. 그리고 왜 대통령의 자리에서 깊은 한계를 느꼈는지 읽었다. 마음 저리게 공감한다.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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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5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6 0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7-06-0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오마이는 매일같이 똥을 싸대고 있는데 그 대표의 책을 읽는다고요? 본문과 결론이 안 어울리네요.

비로그인 2017-06-0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 시기 좀 보세요. 돈 벌려고 책 낸 거 안 보이나요? 정말이지 한경오는 좆중동보다 더 역겹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광주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불리지만 당시엔 다들 그렇게 불렀다. 4학년 어느 수업 시간, 선생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다가 입을 꼭 다물고 주먹을 꽉 쥐고 약간 흥분한 상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기억은 없다. 다만 말미에 "여러분들이 크면 반드시 이 일은 알게 되고 알려져야 합니다." 그랬다. 여러분이 크면... 당시 선생님은 광주에서 대학교를 다니다 휴학을 하고 시골에 내려가 교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선생님이 적어 그게 가능한 시절이었다. 친구들의 죽음과 아픔을 눈으로 보고 체험했던 선생님은 피바다가 된 광주를 잊으면 안된다고, 세상이 바뀌면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며 주먹을 꽉 쥐셨다. 그리고 37년 가까이 흘렀다. 세상이 바뀐 것 같았는데 더디게 더디게 흐른다. 


오늘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마량장으로 갔다. 고양을 살 생각이었다. 그동안 미루고 또 미뤘다. 아니 사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오늘 5.18 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광주를 기억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 났다. 그리고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고양을 사러 장에 가 오천을 주고 고양이 한 마리를 사왔다. 이름을 뭘로 할까? 광주? 빛고을? 고양이 이름으로 안 맞다. 그럼 뭘로 할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작년 여름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사실 글은 읽기 쉬운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주항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언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 내 주변엔 나보다 7-15살 정도 많은 나이의 형들이 죽은 가족이 적지 않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가슴이 묻고 살 것이다. 그동안 악날한 전두환과 그 후 세대, 한나라 당과 바그네 일당 등은 얼마나 많이 광주가 북한이 개입한 전쟁이라고 조작해 왔던가. 사진에 나온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거짓이라며 끝까지 고집했다. 

















광주항쟁을 기록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개정되어 다시 나온다고 한다. 읽고 싶다. 그리고 민중의 아픔을 담은 그의 소설 <장길산>도 읽고 싶다. 우연히 그의 책을 알게 되면서 시대를 담고 해석하고 조망하는 진정한 작가의 정신이 느껴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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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자정이 다 되어 2박 3일의 긴 주말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가 골목 입구에 주차하면 가을이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 나온다. 그런데 어제는 뛰어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작년 겨울 겨울이가 쥐약을 먹고 죽은 적이 있어 이 가을이도 혹시 쥐약을 먹은 것이 아닐까? 쓸쓸한 시골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 없이 무너졌다. 집에 도착하자마도 아이들에게 '가을이 어디간줄 알아?' 하며 가을이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방금까지 있었다고. 십 여분쯤 지나니 뒷집 개와 함께 나타났다. 흐........ 이 녀석...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었구나. 와줘서 고마웠다. 




몇 달 전에 사 놓고 아직도 읽지 않은 윌리엄 폴 영 장편소설 <갈림길> 읽고 있다. 전에 <오두막>을 읽을 때 느꼈던 감동이 워낙 커서 리뷰나 추천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사고 말았다. 그런데 아직도 안 읽었으니 마음이 짠하다. 비록 오늘 읽기 위해 펼쳐 들기는 했지만 얼마나 흡입력이 있어서 끝까지 읽게될런지 모를 일이다.


윌리엄 폴 영의 소설은 기독교 풍인데 범신론적 느낌이 강하다. 자연과 하나님이 다르지 않아 보이고, 평화와 사랑을 모든 소설에 끼워 넣었다. 어쩌면 위험하고, 어쩌면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쨌든 난 그의 소설을 좋아 한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업가 앤서니 스펜서, 완벽한 삶을 사는 그에게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그에게 갈림길이 나타난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문득 프로스트이 '가보지 않은 길'이란 시가 생각난다.


가보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난 두 갈래 길 

아쉽게도 한 사람 나그네 

두 길 갈 수 없어 길 하나 

멀리 덤불로 굽어드는 데까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곤 딴 길을 택했다. 똑같이 곱고 

풀 우거지고 덜 닳아 보여 

그 길이 더 마음을 끌었던 것일까. 

하기야 두 길 다 지나간 이들 많아 

엇비슷하게 닳은 길이었건만. 


그런데 그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발길에 밟히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어 

아, 나는 첫째 길을 후일로 기약해 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법이라 

되돌아올 수 없음 알고 있었다.  


먼 먼 훗날 어디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렇게 말하려나 

어느 숲에서 두 갈래 길 만나, 나는... 

덜 다닌 길을 갔었노라고 

그래서 내 인생 온통 달라졌노라고.


잘 몰랐는데 <이브>라는 소설도 보인다. 이브는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다. 


사람은 모두 제길을 간다. 그런데 어떤 길은 슬픔의 길이고, 우울한 길이다. 또 어떤 길은 행복의 길이고 기쁨의 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슬픔의 길을 가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발견하고, 행복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우울해 진다. 당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보며 자신은 그렇지 않음을 감사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가을이는 행복하게 사는 데 날 행복하게 한다. 그것도 조금 이상하다. 난 누군가를 기쁘게 한 적이 있을까? 별로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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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지난하다. 가뭄에 목말라 허덕이던 지난 주와 다르게 이번주는 연일 비다. 여름을 알리는 비일까? 가끔 삶이 무겁다는 생각보다 밀도가 높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피하게 천천히 가야할 때가 온다. 허송세월 보내는 듯하고, 삶이 퇴행하는 것 같지만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흐른다. 보내고 나면 모두 지혜를 주고 소망을 준다. 오늘 점심을 먹기 위해 텃밭에 나가에 상추게 제법 자랐다. 잎다리를 몇깨 뜯어 비빔밥에 넣었다. 매일보면 크지 않아 보이던 상추가 이틀만에 보니 제법 자랐다. 관심이 사랑이라지만, 때론 적당한 무관심도 좋은 것 같다. 



지난 주부터 교리 서적을 주로 읽어보고 있다.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탁월하고 정밀하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고 있다. 로버트 쇼는 섭리에 대해 피조물을 보존하고 통치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실 섭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정의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만물을 움직이신다. 모호하고 아이러니가 가득해 보이지만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일정한 법칙과 원리가 지배한다. 




어제부터 읽고 있는 새뮤얼 볼턴의 <크리스천, 자유를 묻다>에서는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성경적으로 탐색한다. 2장에서 새뮤얼 볼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어려움도 극복한다. ... 하나님은 자녀에게 사랑의 영을 주신다. 사랑의 영이 주어진 까닭에,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을 일이 즐겁고 기쁘게 행할 수 있는 일로 바뀐다."(41쪽)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란 진리에대한 종속이며, 사랑하는 것에 천착하는 것이다. 루터가 노예의지론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자유는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이며 자발적이다. 그런면에서 의지의 자유는 노예가 아들로서의 자유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성도를 지키시는 교리다. 한 번 택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엄밀하게 죄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지만, 이웃과 사회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사랑은 이웃 사랑이 있지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자유는 관계적이며, 절대와 상대의 간극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 새물얼 볼턴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율법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율법에 순종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141쪽)


율법을 행위나 삶으로 읽어보자. 훨씬 쉽게 이해된다. 자유는 삶이 배제되지 않는다. 즉 절대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늘 상대적이다. 다만 존재의 자유는 절대적이며 독립적이다. 존재의 자유는 삶의 자유 속에서 운명지어진다는 점도 잊으면 안된다. 사랑은 늘 타인을 향하는 것이기에. 


여름이 왔다. 아카시아 꽃이 천지다. 오늘도 하나님의 섭리의 시침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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