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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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일곱시를 가르키는 시곗바늘의 각도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편안하다면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누구를 만나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자신에게 가슴이 설레길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너무 먼 어딘가로 초월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훨씬 더 관대하고 자연스러워졌지만 더이상 사랑을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나를 슬프게 했다. 자신의 소유물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나로부터 그것을 하나하나 빼앗는 식의 무력한 산수에 골몰했던 스물아홉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77쪽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78쪽

기억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아둔하고 자존감만 높았던 나는, 나만 모르는 장소에서 나만 모르는 얼마나 많은 수치스런 행위와 제멋대로의 오해를 반복했던 것일까.-118쪽

자기 악을 아는 것만도 대단한 성숙에 속한다... 등신과 바보. 둘 중 누가 더 불행한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등신이고 모든 남자들은 바보라는 관념이 점차 육중한 건물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가끔 바보를 속여먹는 불세출의 등신도 있다지만 단연코 불행한 쪽은 등신일 수 밖에 없었다. 바보는 불행조차도 모르니까.-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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