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는 이 책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고등학교 때 공부가 하기 싫어 소설을 많이 읽긴 했지만 그 땐 물심양면으로 여유가 없어 그저 집에 있는 책만 줄창 찾아내서 읽곤 했으므로 나는 이 책 속의 작가들을 단 한 명도 알지 못했다. 집에 있는 책 주인의 편향적인(?) 소설 취향을 따라서 읽고, 언어영역 대비라는 미명아래 몇 십년 전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척만 했던 나는, 어찌보면 저 책 한 권으로 드디어 가장 현대적인(?) 작가들을 한 번에 만나게 된 것이다.

 

B선배가 이 책을 내게 권했을 때, 나는 슬쩍 곁눈으로 껍데기만 보고는, 아 재미없게 생겼다 생각하면서 어색한 미소로 그 책을 받아들었다. 포커페이스는 절대 되지 못하는, 감정의 바로미터인 내 얼굴 근육의 미세한 일그러짐을 당연히 감지한 그 선배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한 번 읽어봐. 정말 괜찮다니까. 읽고 나면 그 속에 있는 작가들 다른 작품이 찾아 보고 싶을 거야. 아마 분명히 그럴걸.

스무살. 더이상 소설을 읽으며 공부하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되던 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나에게 날아온 나달나달한 그 책은 며칠이나 가방 속을 굴러다니며 그저 방치되었다. 내가 왜 이 저주받게 재미없는 과를 선택했나, 깊은 우물에서 퍼올려지듯 끊임없이 솟아나는 차가운 의문에 나는 그 때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무언가에 홀리듯 뜬금없이 시작한 동아리 또한 갑작스레 두 배로 늘어난 술껀수들을 내게 제공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술 덜 깬 일요일, 집에서 굴러다니며 남은 알콜의 잔해를 삭이고 있던 날, 나는 드디어 그 책을 읽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그 이후론 아주 쉬웠다.

윤대녕을 찾아서 도서관을 헤매다가 인기있는 그의 책이 빈자리의 먼지로만 존재할 때면 난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려 아직도 내겐 카드가 많다구- 하는 우스운 혼잣말을 하면서 김형경, 성석제, 은희경, 차현숙등을 읽어갔다. 그 선배의 말처럼 나는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그 책 속 작가들의 완벽한 전작주의를, 감히, 꿈꾸었다.

완벽한 구심점이자 읽기의 축이 생기자 나의 독서는 횡으로 넓어져 갔다.

그들 중의 누군가가, 오정희는 아름답다- 말하면 나는 오정희를 찾아 읽었고,
또 누군가가 이문구 대단하다-하면 이문구를 읽었다.
누군가가 페루-를 말하면 로맹가리를 읽었고, 인용된 어두운 상점, 을 보고는 패트릭 모디아노를 읽었다.
그들을 알고 읽는 한 나는 계속 뚱뚱해지며 허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내가 96년 이상문학상, 그 책을 볼 때마다 아련해지는 것은, 그 책이 지금 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사실 이제는 그들의 신간이 나와도 예전처럼 열광하며 사거나 빌려보거나 하지도 않지만,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토대로 구축된 나의 독서는, 결국
그 선배가 제공해준 계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서야 나는 시인한다.

그 선배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 있는 게 없고,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가끔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중에 언젠가 혹시라도 만난다면 나는 꼭 말하고 싶다고 늘상 생각한다. 그 때, 얼마나 좋았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좋아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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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8-12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4-08-12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저도 딱 그렇게 시작했는데요.
울언니가 현대문학을 정기구독했거든요. 삼년간...

그래서...그나마 공백기간이 김에도 작가들을 쫓아갑니다...

아영엄마 2004-08-1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 년 이 서적이 나오면 사보곤 했는데..요 몇 해동안은 사보질 않았네요.. 요즘은 남편이나 저나 쉽게 읽히는, 흥미 위주의 책들만 읽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