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찰스 핸디 지음, 김진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찰스 핸디의 최근작인 <코끼리와 벼룩>에 대한 주요 경제신문사들의 극찬 때문이었다. 그 책을 막바로 사서 보기보다는 이 사람의 일관된 주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 목표로 친다면 책을 잘 못 골랐다고나 할까. 그러나 제목이 워낙 멋있어서 나같은 월급쟁이들을 유혹하기에는 최선인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책의 내용이 그리 혹평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같은 다이제스트 세대에 맞는 글의 규모나 내용에 맞는 '왕도', '해법'이 없다는 것이 어설픈 아쉬움이었을까? 아마도 이것이 우리네 '성공시대'와의 차별성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일관되게 주장한다. 성공이 목표가 아니라고, 돈이 목표가 아니라고...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정말 열심히 보람차게 한다는 것이 진정한 성취라고. 물론 그 기준으로 사람을 선정하다보니 도대체 그 사람이 왜 저런 성취를 이루었나 하는 결론에 이르면 '결론이 없다'.

남다름과 창의성, 노력과 끈기, 여유와 행운...여러 가지 이유들이 이들의 성취를 둘러싸고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기가 하고싶어하는 일을 하고있다는 사실과 그 활력이 떨어지면 그 일을 하고싶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성공의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기업(企業)을 일으키는 기업(起業)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다보니 아둥바둥하는 수성(守城)의 이야기는 없다. 거기다 이들이 활동하는 런던은 과거 제국주의의 본산이었던, 서구 제국 중 가장 전통과 규범에 밝은 곳이다. 아무리 나쁘게 평해도 여기는 '시장터' 정도는 된다.

거기에 비하면 번역된 이 책을 읽어야할 우리들은 시장터 정도만 되어도 이들보다 더 훌륭한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경쟁력'을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사람들이다. 물론 창의력이니 지구력이니 남다름이니 하는 것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성공의 목표가 오로지 돈으로 표현되는 천민 자본주의의 표본 대한민국, 그 '전쟁터'에서 그들의 시장터 이야기를 읽는 것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이 사람의 책을 한 권 더 읽게 될 듯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체와 욕망
최봉영 / 사계절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최봉영 교수의 지속적인 관심의 배경은 서구의 생각과 말과 글로 구성된 철학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하느냐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아이덴티티, 즉 엄격한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학습하며 사서삼경을 읽고 커서는 서양학문을 하며 한국사회의 지성으로 살아야했던 배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가 왜 이 작업에 그렇게 몰두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서구인들의 방법을 빌려 한국사회의 성격을 논하기도 하고, 조선시대를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게 본다면 독특하고 고유한 작업이며, 어떻게 본다면 이미 대세가 결정나버린 이 시점에서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작업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주체와 욕망>은 그의 저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업으로 평가받아야할 것이다. 내가 최교수의 저술을 '저술'이라 부르지 않고 '작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저작들이 하나같이 수학공식을 증명하는 듯한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치밀함이고 어쩌면 성실함이지만 어쩌면 철두철미하게 핵심논리를 찾아가는 단순함일 수 있는 이 '해석'을 그저 글을 쓴다고 표현하는 것이 너무 불성실한 독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최교수를 존경한다. 나는 오로지 그의 책을 통해서 그를 만나지만 그가 한국 근대지성사에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역사가 기억할' 한 사람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이 책의 독자들은 저 유명하신 이름들, 칸트,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헤겔...칼 맑스, 미셀 푸코 들이 수행했던 그들 나름의 분석작업을 한국인이 그저 번역하고 추정하고 '누가 그런 이야기 했더라'라고 되읊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글을 통해서 '세상이 이렇고 인간이 그렇더라'고 하는 '선언(!)'을 듣는다. 이 놀라운 경험 앞에서조차 우리는 '이런 류의 사람은 약간 또라이 아냐?'라고 고개를 젓도록 교육받고 길들여져 왔다.

그의 독특한 이론, 한 단면을 들여다보자. 지구에 사는 인류들은 그가 보기에 4가지 정도의 세계관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통체-종속자(whole-subordinator) ②개인-합체(individual-assemnlage) ③통체-연기자(whole-destinator) ④ 통체-부분자(whole-positioner)

①은 하나의 신에 속한 인간이라는 세계관으로 비유할 수 있다. 바로 카톨릭, 이슬람 등의 절대신을 믿는 집단들이 여기에 속한다. ②는 하나하나의 개인들이 모여 거대한 집합체를 만들었다는 서구적 근대의 세계관이다. ③은 시간의 거대한 흐름 앞에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인도적, 불교적 세계관이고 ④는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유교문화권이 우주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언뜻 괴변처럼 들릴 수 있는 저 해석은 성리학적 질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채 조선의 비루한 역사적 유산만을 물려받은 오늘날의 세대에게 당연히 엉뚱한 소리로 들릴 것이지만, 그들이 바로 ②번의 세계해석을 학교교육으로 주입당하면서 나머지 세계관을 성장의 환경에 따라 자기의 선택권에 상관없이 섭렵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해석을 좀 달리 보지 않을까?

이 책은 그가 철학교과서를 내고 싶어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담론이 어처구니 없이 서구적 주체 - 사실 우리의 문화적 이성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에 경도되면서 주체의 한 표현인 욕망만을 주체의 유일한 목적인 것으로 극단화하는 것을 못박고 싶었던 것이다. (이건 내 해석이지만)

저자의 의도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한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적절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간과 세계'라는 서구적 철학주제를 '수학적으로' 정리했다는 것, 이것을 경험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수고는 가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에는 신하가 셋이 있었다. 조선의 신하는 지금 우리가 보는 관료와 정치인을 합한 존재들이었고, 사회적 존재로는 지식인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그들은 지배계급이기도 했다. 조선에는 서양 귀족들의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몸으로 실천한 세 명의 신하가 있었다. 물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해 자신의 생애를 살다갔지만, 우리 역사에서 조선이라는 탁한 물을 온 몸으로 펼쳐간 신하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나는 그 중 셋을 같은 반열에 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정도전이다. 자신을 개국의 기획가로 설정한 이 사람은 무인 이성계를 앞세워 썩은 냄새가 나는 고려말의 상황을 개편하고자 했다. 물론 공과는 있으나 그의 노력의 결과로 조선은 일단 우리 역사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이름이 아닌 나라 이름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가 나라를 세웠다. 그 다음은 김종서였다. 세종의 충신이었던 김종서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은 아마도 그의 비극적 최후를 우리 텔레비젼 드라마 기획자들이 꽤 자주 대하사극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터이고, 종종 4척 단신인 그를 왕권을 위협하는 깡패장군의 모습으로까지 묘사해가며 수양대군과 대결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했던 군주인 세종의 심복이었다. 그가 나라를 이었다.

김종서의 말년은 조선이라는 성리학의 나라가 얼마나 그 명분을 위반하며 더러운 냄새만 남은 위선의 나라로 변했는가를 웅변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우리는 조선에서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종교적 정치전쟁'의 모습을 본다. 그들은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했고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다.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닫아야했을 세 번째 신하는, 그러나 죽어가는 그 나라를 살려놓는다. 피폐한 살림과 허약한 국방으로 명나라와 함께 가버렸어야 했던 조선은 이 세번째 신하 때문에 극적으로 기사회생한다. 행복한 결말인지 비극적 최후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죽음으로 조선의 마지막 신하를 잃었다.

그리고 그는 무인으로서는 최초로, 마지막으로, 비록 죽은 후이나 영의정의 반열에 오른다. 수백년후 정조임금은 자신이 왕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에게서 찾는다. 조선이 아직까지 존재할 수 있음은 오로지 충무공의 공이라는 그의 고백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더 후에 충무공 이순신이 죽음을 걸고 싸웠던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그 식민지에서 일본군 장교가 되어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던 사람이 조선의 후예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자신과 이순신을 비유하고 등치시키기 시작하면서, 우리 나라의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아주 나이 많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듯한 이순신은 그래서, '구리 이순신'이 되었다. 나도 구리 이순신을 배우며 충무공 찬가를 부르며 현충사와 한산도를 수학여행 하며 자라난 그 세대 중의 하나여서 '이순신 따위'를 읽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지난 10년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건 다 아는 이야기였다. 2001년 새로 만난 이순신, <칼의 노래>라는 소설이 들려주는 이순신은 나의 기이한 그리움과 목마름을 채워주지 못했던 여러 전기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다. 당파싸움을 헐뜯기 바빴던 카야마 미쓰로(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으로 끝날 뻔 했던 문학적 이순신의 위기를 우리는 김훈씨로 해서 넘겼다.

이 책에서 나는 마치 진정한 이순신의 실체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소설이라는 자각을 수시로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허구에 대한 이런 몰입의 위험함 때문에 소설을 웬만해선 읽지 않는 나는, 해마다 내가 뽑은 올해의 책 반열에, 2001년에 내가 정한 책으로 이 책을 선정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짓말
제임스 W. 로웬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을 모두 읽었다. 미국 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뒤집는 사실의 선명성만을 본다면 이 책은 마치 촘스키의 글을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백인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백인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학살했다는 아주 고전적인 역사뒤집기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미국의 인종차별주의가 어떤 방식을 온존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던 진정한 영웅들을 어떤 방식으로 역사의 뒷편으로 묻어버렸는지를 말한다.

미국의 고전적인 '아버지'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채색되어 영웅화 되었는지를 밝히는 대목에 오면 갑자기 북한의 우상화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고 민족자결주의의 영웅 우드로 윌슨이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면서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하고, 멕시코와 중미, 남미에 심심하지 않게 쳐들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지구촌을 이끈다는 미국이 정말 초라해보인다.

그들의 역사는 짧지 않았으되 성조기 앞에 눈을 부릅뜨고 애국을 맹세하는 그들의 역사관은 진정으로 얕았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얄팍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을 미국답게 만든 진정한 영웅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들 대부분은 당대의 논점을 생략당한 박제로 남거나 간단한 에피소드로 남거나 삭제당한다. 어떤 경우에는 '미친 놈'으로 취급당하기까지 하는 걸 보면, 20세기 후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미국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그들은 간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팍스아메리카나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제국주의의 맹주였다. 잠깐동안 소련의 가냘픈 견제를 받은 것 외에는 한 번도 그 지위를 위협당한 적이 없는 독불장군의 위치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에 맞는 역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의 역사는 '맹백하게 왜곡되어' 춘추필법으로 그들의 후손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바로 이런 '오만'이 제국을 무너뜨리는 출발이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저자는 바로 그점을 염려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아메리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학생들이 그 짧은 역사수업에서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판에 박은 듯한 아름답고 숭고한 미국의 도전과 성취를 외우면서, 그들은 세상을 판단하는 지혜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월남전은 북한과 남한이 싸운 전쟁이라고 대답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사회 교과서가 하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으면서도 역사/사회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미국의 심각한 '우민화'가 어떤 재앙으로 다가올 것인가가 저자는 더 근심스러운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전세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어느 놈이든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삼류 조폭의 자세로 우뚝 서고있다. 그나마 미국의 역사에서 드물었던 60년대와 70년대가 거둔 미국의 반성을 조롱해버린 80년대와 90년대를 이제는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질서유지'에 필요하다면 파시즘이라도 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테러범에 대한 고문 운운')

아쉽지만 서평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 달랑 한 권으로 온 국민이 같은 이야기를 읽고 같은 문제로 시험을 쳐서 사회적 등급을 정하는 나라에서, 그마저 수능시험에는 필수과목에서 제외된 나라에서, 그 교육을 그대로 받으며 살아온 내가 미국의 역사교육을 운운하는 것이, 뒷골이 당기는 일이라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 눈의 티끌은 커보이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서 속의 암호 - 신들의 귀환, 신의 3부작 2
에리히 폰 대니켄 지음, 이영희 옮김 / 삼진기획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첫째 단원은 놀랍게도 '소설'이다. 『성 베르리츠의 돌』이라는 짧은 글인데, 데니켄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소설이 은유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류의 초고대에 대한 태도다. 대파멸 이후 어렵게 살아남은 종족들이 지식과 기술은 전수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현대 인류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고, 그래서 전설과 신화로 흘러온 것들을 순진한 고대인들의 상상으로 넘겨버리지만, 알고보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데니켄이 쓴 『미래의 수수께끼』로 그를 처음 만났던 때보다는 많은 초고대와 미스테리 관련 도서가 쏟아져나왔지만, 그래서 그의 글들이 이제는 좀 거칠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는 선구자다. 불행하게도 이 방면에는 텍스트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데니켄의 책이 기본서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이 분야를 연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예의상 데니켄 한 권 정도는 읽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라리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길게 쓴 그레이엄 행콕의 책들 보다는 데니켄의 횡설수설이 더 재미있다. 그의 변명처럼 자신의 저서를 처음부터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듬성듬성 엮을 뿐이라고는 하지만, 맹성렬이나 김진영 형제와 비교해봐도 책을 엮는 기술과 정성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데니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초고대의 정확한 진실을 찾아 헤메고 있다. 비록 이 학문은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어서 당대에 끝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러나 생각해보라. 100년 전에 현대물리학은 '애들이 하는 잠꼬대' 취급을 받았고 신화학과 성경의 접목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데니켄의 이야기들이 평가받는 날들이 오는 날, 그날은 우리 지구인류가 새로운 차원으로 개화하는 날이 틀림없다. 내 느낌으로는 별로 멀지 않았다...

데니켄은 이 책에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서술들을 근거로 인류가 과학물질문명을 보유한 외계인들과 접촉했다는 것을 재구성해간다. 종교적 편견을 가지지 않고 읽어가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과학기술문명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역사기록인 성서는 현재 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전이자 그 일부는 이슬람의 성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 속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을 데니켄처럼 분석하는 행위와 그 결론이 신앙인들에게 못마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라, 우리 인류가 하느님을 어느 수준으로 해석해낼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인류는 현재 수준에서 하느님을 해석하고 믿을 뿐이다. 그리나 그것이 하느님의 모든 형상과 내용이라고 우격다짐할 수 있을까?

데니켄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객관적인 사실로 볼 경우, 여기에 출현하는 사람(?) 또는 실체(?)들은 결코 우리가 신앙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무지가 강력한 힘을 지닌 외계인을 신의 모습으로 떠받들었을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가정을 하고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개미』라는 소설에서도 철없는 어린아이가 개미와 교통할 수 있는 언어제조기를 이용해 개미들의 신으로 군림하고, 개미들은 그 강력한 이름, '손가락 神'을 신앙한다. 어쩌면 그 모습과 그렇게 꼭같을 수 있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