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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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버스에 지하철을 연이어 타고 서울역에 다 와서 <제국>을 모두 읽었다. 알라딘을 뒤져보니 작년 12월23일이 구매일자로 나온다. 책을 내 손에 놓은지 약 3개월만에 읽은 셈이다. 이 두꺼운 책을 모두 읽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엄청난 보람(!)을 느껴야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너무 먼 미래의 모습이어서일까 아니면 그 핵심적 개념을 이해하기에 나는 완고한 20세기의 사람이어서일까. 어쨌거나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인하며 책을 덮었다.

그러나 뭉클뭉클 솟아나는 느낌을 어쩔 수는 없었다. 노동이 바뀌었고 권력이 바뀌었다. 제국은 대중의 저항을 따라잡으며 그 힘으로 생존하고 있다. 저항이 멈추는 순간 제국은 에너지를 잃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저항을 풀어놓을 수도 없다. 소통과 힘, 산 노동, 생체권력, 잡종, 기계인간...무기력할 듯한 추상어들은 식탁 위에서 다시 살아나 춤추고 있었다.

부패한 낡은 관행을 무너뜨리며 돌풍을 몰고온 인터넷 모임 노사모, 관료로 시작했지만 한국 영화계를 전 세계에 알리는 진짜 영화계의 따뜻한 아버지로 바뀌어버린 김동호씨, 집에서 회사일을 하던 아버지와 회사에서 내 문집을 만드는 나, 찰스핸디가 주장하는 '코끼리와 벼룩'의 시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이 사건과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난 나에게는 하나의 궤적으로 얽혀들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제국이다.

아직 그 모습의 구체성을 인지하기에 너무 많은 것들이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긴 하지만, 이제 서서히 새벽이 올 것이고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아마 그 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 책의 '진짜 서평'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기까지는 이 가슴 뭉클한,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의 기억만을 간직해야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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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정신
찰스 핸디 지음, 노혜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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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평점에 대해 한 마디 해야겠다. 별 세 개라는 것이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순전히 내가 이 책을 이해한 정도를 표시한 것이다. 차라리 더 어려웠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이 책은 매우 평이하고 담담한 글로 몇 가지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것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에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희망이 있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라고 억지로 붙여놓아도 좋겠다. 저자의 목소리는 경제학자 답지 않게 매우 잔잔하다. 마치 최고경영자의 은퇴후 회고록을 보는 듯한 느낌이지만 거기에 비한다면 지극히 사회적인 교수의 목소리가 배어나와 정체성을 느끼게 해준다.

반면 경제철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경영학자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나는 상당한 혼란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마 선입견이겠지, 경제학자가 회사와 기업과 효율과 효과를 이야기하고 혁신과 생산성과 창의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이더란 말인가. 그것은 경영학이라기보다 경제학이 더 가깝다...왜 너는 아담스미스와 슘페터와 칼 맑스만이 경제학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영국 노동당이 펼치려는 '제3의 길'과 비슷한 최소한의 윤리와 책임이 있는 자본주의의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기업의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조직을 읽다가 다시 환경문제와 사회적 분배의 실패 이야기를 듣다가 또 다시 혁신기업의 사례를 읽는 이 기이한 탐험이 나는 너무 낯설다. 아마도 그만큼 이 책이 독특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종종 그의 한 마디는 천민 자본주의에서 허덕이는 대한민국의 국민(시민이 아닌)인 나에게 천국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할 정도로 건전하고 따스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대안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길러낸 극단의 효율과 최고의 추구에 대한 당연한 반성이 생략된채 혁신적인 최고의 기업이 사례로 나오면서 대안적인 기업모델로 제시된다. 정말 내가 모자란 놈일까. 꽉 막힌 흑백론자일 뿐일까.

하지만 이 책을 꼭 나처럼 읽을 필요는 없겠다. 하나의 단면 단면을 본다면, 이 책은 기업운영자들이 보는 경제지가 극찬하는 면도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 비판과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온건한 개혁론자들이 써먹을 만한 많은 아이디어들이 함께 실려있다. 아마 미래에 대한 전망에 가면 자본주의적 효율과 건전한 자본주의의 유지가 결코 다른 문제가 아님을 확신하는 저자의 논지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나에게는 독특한 체험이다.

'영국 노동당보다 약간 좌파적인 시각'일 듯하다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지만 확신은 들지 않는다. 물론 자본주의를 절대신으로 섬기기는 사람에게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게는 한마디로 헛소리일 것이고, 최소한 오늘을 아파하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되돌이켜볼 아이디어가 많이 많이 실려있다는 점에서 '사람에 따라서는' 추천할만한 책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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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그늘 당대총서 12
김동춘 지음 / 당대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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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책을 읽고 서평을 끄적거린다는 것은 어쩌면 맛있는 밥을 먹고 뭐가 어떻게 맛있었다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다. 그냥 잘 먹었다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그냥 읽었노라고 묻어버리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글들이다. 비록 김교수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이어서 쓴 글은 아니되 써놓고보니 하나의 주제로 묶일 수 있는 글들을 모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근대를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갖게 하기에 딱 알맞은 책이 되었다.

읽기 전에는 참 걱정도 많이 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적어도 진보적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쓴 책들이 나에게 항상 안기는 결말은 '아픔과 절망'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건가. 사회가 다 썩어서, 분단이 오래되어서, 역사가 정의롭지 못해서 그래서 이 문드러진 사회에 내가 산다는 것이 끔찍하다는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차라리 차악을 택하자는 강준만에게로 돌아섰다. 최선으로 가는 방법이 오리무중이라면 최악을 선택하지 않는 차선책을 택해야한다는 건 상식적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동춘의 책을 내 손에 올려놓기 까지는 거의 반 년이 걸렸다. 공중에 뜬 사회악 분석을 읽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좌파의...

이 순진한 두려움을 김동춘은 단번에 날려버린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다. '진정한 진보'를 만난 것이다. 이 감격은 강단진보와 살롱진보들이 결코 줄 수 없는 '살아있는 언어의 힘'이다. 사회과학 용어가 마술처럼 내가 살고있는 세상을 적절하게 표현하며 동감할 수 밖에 없는 명제로 문제를 정의하고 그 원인을 진단하며 처방안을 제시한다면...밥이 어떻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작 아쉬운 것은 김동춘 교수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 너무 온정적이고 '나라와 민족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한국사회는 '그늘'이 아니라 '진창'이고 '똥통'일 뿐인데, 그에게는 끔찍하지만 가엾고 처참하지만 불쌍한 가족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최소한의 희망이 없다면 과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어렵사리 그 최소한의 희망 정도를 우리 힘으로 일구어냈다는데 나도 동의한다, 최소한만...

이민 가고 싶고, 도피하고 싶은 한국의 장년들(남들이 386이라고 부르는, 80년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살았던 부류들)은 이제 다시 그 고민의 방향을 돌릴 때가 되었다. 도대체 한국사회의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를 알고싶지도 않을 때, 바로 그 때가 진정으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를 찾아나설 때이다. 이 책은 아마 그 고민의 시작을 열어주기에 충분한 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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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김성호 지음 / 푸른숲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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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희가 눈 앞에 다가온 김성호씨의 이 책을 읽은 느낌은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마치 수수께끼의 상형문자를 해독해놓은 듯한 그 결과에 가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다. 설령 이것이 완전한 진실은 아닐지라도 진지한 해석을 함께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저 '놀랍다'이다!

위대한 한민족의 웅장한 과거를 재현한 것도 아니고 무슨 족보책을 파고들어 씨족의 기원을 찾아낸 것도 아니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한국고대사의 흐름은 결코 다른 연구결과들에 비해 만만치 않다. 특히 대한민국의 역사가 자신들의 선조로 비정하고 있는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연원을 찾아들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정말 살떨리는 흥분을 느끼게 된다.

과연 이런 분석을 시도해볼 수 있는 학자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이 연구결과의 희소가치, 그 가치 자체에 대한 외경심이 저절로 솟는다. 이 대단한 가치를 제대로 된 학술용어를 사용해 표현해보지 못하는 내 능력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한 마디로 표현해보자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이후 한국고대사에 대한 관점을 또다시 바꿀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해야겠다.

우리의 성씨는 왜 그리 흔할까? 왜 김씨 박씨 이씨가 그렇게 많은 것일까? 김성호씨는 이 책에서 한국의 성씨체계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른 것을 근거로 씨성을 찾아가면 한국민족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의 계보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설을 바탕으로 한국 고대사에 출현하는 다양한 종족이 어떤 흐름을 통해 한국종족으로 성립되었는지를 파악해나간다. 주제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줄거리는 마치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가벼운 읽을거리만 굴러다니는 대중 역사서 판에서 아마추어 연구가의 이런 저술작업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것이고, 그래서 얼마나 더 큰 칭찬과 격려를 보내야하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있다. 이 서평이 깨알만큼이나마 고된 연구작업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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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1
김성호 지음 / 맑은소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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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김성호씨가 쓴 책들은 대부분 서가 깊숙히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나는 그가 이후에 쓴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을 읽은 후에야 이 책을 찾았으니, 저자의 이름으로 책을 고르는 내 버릇을 한 번 더 확인한 셈이다. 소감은? 놀라운 책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따분한 고대사 편력들은 거의 일제시대에 윤곽이 만들어진 것들이라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 그나마 그것도 축소되어 교과서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역사를 찾는 젊은이들을 편향으로 몰고갔다. 그 하나는 역사적 니힐리즘에 가까운 '식민사관 굳히기'고 다른 하나는 영광스러운 고대사를 회복해야한다는 다소 극우적인 국수주의 사관이다.

영광스러운 시대를 재현해야한다는 사명감은, 80년대 '한단고기' 신드롬 이후 본격화해서 많은 역사가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고대사를 찾아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인-한웅-단군의 1만년 제국이라든가, 치우와 황제의 대결을 비롯해 요순임금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라는 트집성 해석도 그 부류에 속하고, 실체가 있는 대륙백제와 중원 고구려를 밝히려는 작업들도 거기에 속한다.

이 작업들은 때로는 황당한 몽상으로 치닫기도 하고 때로는 진지한 역사재해석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하는데, 김성호씨는 이런 신드롬 세대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고대사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연구하며 재해석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의 백제연구의 집대성 판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은 백제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픈 사람이면 꼭 읽어야할 해양제국 백제의 실체에 접근해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왕건이 왜 오씨부인과 결혼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 나주호족과 개성호족의 결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모두 장보고가 이룩했던 해상무역권에서 이루어진다. 또는 왜 장보고는 신라사람이 아니라 당나라 사람일까? ▶ 청해진 대사라고 하는 대사 직함은 신라의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보고는 신라땅에서 무얼 한 것인가?

망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홍금보와 홍명보의 관련성을 상상해본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던 그 '강남'이 왜 그리 가깝게 느껴졌는지에 대한 재해석도 시도해본다. 강남제비가 등장하는 흥부와 놀부의 진짜 이야기는 혹시 왕건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해양백제의 후손들이 흩어져 살고있는 동아시아 해변가에서 백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이 부푼 상상력을 회복시켜준 김성호씨의 책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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