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그늘 당대총서 12
김동춘 지음 / 당대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이렇게 좋은 책을 읽고 서평을 끄적거린다는 것은 어쩌면 맛있는 밥을 먹고 뭐가 어떻게 맛있었다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다. 그냥 잘 먹었다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그냥 읽었노라고 묻어버리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글들이다. 비록 김교수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이어서 쓴 글은 아니되 써놓고보니 하나의 주제로 묶일 수 있는 글들을 모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근대를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갖게 하기에 딱 알맞은 책이 되었다.

읽기 전에는 참 걱정도 많이 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적어도 진보적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쓴 책들이 나에게 항상 안기는 결말은 '아픔과 절망'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건가. 사회가 다 썩어서, 분단이 오래되어서, 역사가 정의롭지 못해서 그래서 이 문드러진 사회에 내가 산다는 것이 끔찍하다는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차라리 차악을 택하자는 강준만에게로 돌아섰다. 최선으로 가는 방법이 오리무중이라면 최악을 선택하지 않는 차선책을 택해야한다는 건 상식적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동춘의 책을 내 손에 올려놓기 까지는 거의 반 년이 걸렸다. 공중에 뜬 사회악 분석을 읽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좌파의...

이 순진한 두려움을 김동춘은 단번에 날려버린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다. '진정한 진보'를 만난 것이다. 이 감격은 강단진보와 살롱진보들이 결코 줄 수 없는 '살아있는 언어의 힘'이다. 사회과학 용어가 마술처럼 내가 살고있는 세상을 적절하게 표현하며 동감할 수 밖에 없는 명제로 문제를 정의하고 그 원인을 진단하며 처방안을 제시한다면...밥이 어떻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작 아쉬운 것은 김동춘 교수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 너무 온정적이고 '나라와 민족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한국사회는 '그늘'이 아니라 '진창'이고 '똥통'일 뿐인데, 그에게는 끔찍하지만 가엾고 처참하지만 불쌍한 가족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최소한의 희망이 없다면 과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어렵사리 그 최소한의 희망 정도를 우리 힘으로 일구어냈다는데 나도 동의한다, 최소한만...

이민 가고 싶고, 도피하고 싶은 한국의 장년들(남들이 386이라고 부르는, 80년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살았던 부류들)은 이제 다시 그 고민의 방향을 돌릴 때가 되었다. 도대체 한국사회의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를 알고싶지도 않을 때, 바로 그 때가 진정으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를 찾아나설 때이다. 이 책은 아마 그 고민의 시작을 열어주기에 충분한 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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